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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수자 Apr 19. 2024

어른을 위한 동화 10선

1화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할머니, 저 준호예요.”

 “준호라? 준호, 누군지 모르겠는데…….”

 “손자 준호잖아요. 준호라고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할머니를 보고 준호 총각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준호 총각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입니다. 하지만, 마흔이 넘도록 결혼하지 않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습니다. 

  오늘도 준호 총각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아가씨와 선을 보고 왔습니다. 하지만, 굳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남들이 한다고 덩달아 결혼해서 구속받기 싫었습니다. 

 “나 혼자 산다.”

  한숨을 쉰 준호 총각은 어머니의 생신 선물로 사 온 케이크를 식탁 위에 놓았습니다.

 “따르릉, 따르릉!”

  주머니에 든 손전화기를 얼른 꺼냈습니다. 

 “네, 하준호입니다.”

  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준호라고? 모르는 사람인데…….”

  잠시 머뭇거리던 아버지는 말없이 끊어버렸습니다.

  준호 총각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현관문 여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머니, 어디 다녀오세요?”

  대답도 하지 않고, 한 발 뒤로 물러나며 눈을 깜빡거렸습니다. 

 “우리 집 맞지?”

 “그럼요, 어머니!” 

 “넌 내 아들 준호고, 그렇지?”

  어머니는 웃옷을 벗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엌 수돗물을 세게 틀고는 두 손으로 거푸 낯을 씻은 어머니는 소매 끝으로 얼굴을 쓱쓱 닦았습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얼굴을 씻다니……, 여긴 화장실이 아니라고요!”

 “이게 뭐더라?”

  식탁 위에 있는 케이크를 가만히 들여다본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생일 케이크잖아요, 예순다섯 번째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머니는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고, 다시 준호 총각을 바라보았습니다.

 “장난 그만해요, 재미없다고요.”

  그러나, 어머니는 웃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멍하니 준호 총각을 바라보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화가 난 준호 총각은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리모컨을 꾹 눌렸습니다.

  화면에는 회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 앵커가 아주 빠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전염병이 팬데믹으로 바뀌자, 또 이상한 전염병이 번지고 있습니다. 연세가 있는 분들부터 시작된 이 병은 차츰차츰 여러 사람에게 퍼지면서 가까운 가족도 몰라보고, 흔히 보던 물건 이름까지도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입맛을 쩍 다신 앵커는 원고에 쓰인 글자를 잊어버린 듯, 다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준호 총각은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른 후, 허벅지를 꼬집어보았습니다. 아팠습니다.

 ‘이건 꿈이 아니고, 현실이구나.’

 “딩동, 딩동, 딩동!”

  벌떡 일어난 준호 총각이 현관문을 열자, 아버지가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도 안경 너머로 준호 총각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손에는 장미꽃다발이 들려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시겠어요.”

 “꽃을 샀긴 샀는데, 왜 샀는지 모르겠어.”

 “참! 아버지도,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잖아요.”

 “생신이라, 생신이 뭐더라.”

  화장실로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준호 총각은 2층 방으로 올라와 버렸습니다. 혼자 산다고 원룸을 얻어 나갔지만, 어머니는 2층 방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털썩 침대에 몸을 던지고 팔베개를 했습니다. 

 “저게 뭐지?”

  천장에 붙여둔 별자리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불을 끄면, 반짝반짝 빛을 내는 별자리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뭐더라? … 칠성,이었는데…….”

  벌떡 일어난 준호 총각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습니다.

  방금 들었던 뉴스 속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건망증이 전염되고 있다? 그럼,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에서 나까지도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고? 보통 일이 아닌데.’

  방 안에 있는 물건을 둘러보면서 하나하나 이름을 대보았습니다. 

 “저건 책상, 걸상, 컴퓨터, 또 책, 그리고 달력…….”

  아직도 천장 위에서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것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으음, 북…두… 칠성이었지.”

  얼른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와서 잊기 전에 모조리 써두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문입니다.’,‘이것은 옷입니다.’,‘이것은 가방입니다.’ 이렇게 붙여놓고는 빨리 거실로 나왔습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글로 써 붙였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서 물건 이름을 천천히 읽도록 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 내려갔지만, 할머니는 자꾸자꾸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준호 총각은 빨리‘나는 준호입니다, 할머니 손자입니다.’라고 써 가슴 앞에 딱 붙였습니다. 

  금방 말을 해주어도 할머니는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눈만 끔뻑거리며 준호 총각만 바라보았습니다.

  준호 총각은 그만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아니야, 이 늪에서 벗어나야 해.”

  여기서 그만두어버리면, 준호 총각도 괴상한 건망증이 전염될 것 같아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것은 텔레비전입니다. 리모컨을 누르면 화면이 나옵니다.”

  리모컨을 눌려 텔레비전을 켜니 여자 아나운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전염성 건망증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나타났습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단단히 화가 났나 봅니다. 박사님, 앞으로 이 현상이 언제까지 진행될 것 같습니까?”

  박사도 흥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는 이때,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상한 것은 임산부와 젊은 부부가 있는 집, 아이들과 함께 사는 집에는 전염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앵커 옆에 머리카락이 은백색 사회학자가 손녀 손을 잡고 말을 이었습니다.

 “아직도 교육비나 육아 문제로 출산을 미루고 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하지 않고 있는 젊은 남녀는 짝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염성 건망증이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준호 총각은 가슴이 답답해 왔습니다.

  할머니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고 있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나는 집이야.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뭔지 아니? 그건 아기를 바라보는 부모의 미소 띤 얼굴이란다.”

  비로소 준호 총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 오늘 선본 아가씨와 결혼하겠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준호 총각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습니다.

 “누가 결혼을 합니까?”

 “네, 아버지. 제가 오늘 선을 본 아가씨와 결혼하겠습니다.”

  준호 총각을 왈칵 껴안은 아버지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습니다.

  식탁 앞으로 간 어머니가 소리쳤습니다.

 “얼른 오세요. 내 생일이잖아요.”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손짓했습니다.

  케이크 위에 촛불이 켜지고, 서로를 바라보며 손뼉을 쳤습니다.

 “축하한다, 어멈아. 준호가 장가간대!”

  장미꽃다발을 어머니 가슴에 안겨준 아버지도 빙그레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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