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일어나 무슨 행동을 해야만 할 소리는 아니지만 잠을 깨우기엔 충분하다. 떴던 눈을 다시 감는다. 몇 시일까? 시계를 보려 전화기를 들지는 않는다. 강렬한 불빛이 시신경에 닿으면 뇌까지 급행 배달이다. 그러고 나면 잠은 더 달아날 거다. 화장실을 갈지 잠깐 고민도 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잠을 더 깰 것 같다. 방광이 버텨낼 수 있을 때까지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리길 바라며 외면한다. 외면해야겠다는 생각은 외면할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는데 기여하기만 하지만 애써 모른 척한다.
잘하는 걸 하자. 엉뚱한 상상. 절세미인이 되어 쉬운(?) 인생을 사는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제트기를 타고 영국에 있는 새로 생긴 한식 식당에 간다. 깊이 있는 장편 소설은 없고 텃밭 농사꾼(초본데 꾼?)의 첫 당근 농사 같은 흐름이 다다. 깊이 심지 않아 당근이 지상으로 다 나와 있어 서양 요리에 내놓을 미니 당근만 하게 커버린 그런 몰골로 말이다. 그 당근은 식용이라기보단 관상(몰골이래 놓고는)용에 가깝다. 그저 추수한다는, 가을걷이를 한다는 의미 부여 정도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쉴 이유도, 그만둘 필요도 없다. 갑자기 스티븐 킹 같은 작가가 되어 몇 주 만에 장편 하나를 끝낸다. 내는 족족 단단하고 스릴 넘치는 소설을 내는 작가는 가는 곳마다 환호요 부르는 곳으로 다 갈 몸뚱이가 없을 정도로 인기다. 상상이란 게 이루어질 수 없는 걸 만들어낼수록 재미야 있겠지만 글 쓴다고, 책 내는 꿈을, 좋은 글을 쓰는 꿈을 꾸며 사는 내게 너무 커다란 물리적, 화학적, 지리적, 철학적 뭐든 그들 간의 거리는 약간의 절망감을 던져줄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이 들길 바라며 하는 상상에 '이건 안돼', '저건 부적절해', '요건 재미가 없어'하며 재단할 필요는 없다. 근데, 실패다. 아무리 상상 속으로 다이빙을 해 봐도 잠이 물처럼 몸을 감싸지 않는다. 눈을 번쩍 뜬다. 낮잠은 이만 자야겠다. 저녁 차릴 시간이다. 아…. 저녁 준비를 미룰 수만 있다면 잠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오지 않는 잠을 더 잡으려 허우적거리는 것도 저녁을 차리는 것만큼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 나의 낮잠은 이쯤에서 접힌다.
컴퓨터를 켠다. 오늘은 딴짓을 좀 참자. 헤매지도, 돌아다니지도 말고 글만 써야지. 막 떠오른 글감을 일필휘지로,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거칠게나마 적는 거야, 고칠 때 고치더라도. 쓰다 보면 어디로든 흘러가니까. 모니터 불이 켜진다. 원클릭으로 열리는 바로가기를 눌러 인터넷을 켠다. 한글 프로그램 같은 곳에 써 놓고 옮겨도 되지만 자꾸 틀린 글자 혼내듯 빨간 줄 그어대며 지적하는 한글에 쓰고 싶은 마음이 별로 안 든다. 큼직하게 쓰는 맛도 있고 무언가 결과물로 보여줄 작업을 하고 있다는 자기 효능감까지 생기는 브런치에 초고를 쓰고 싶다. 브런치를 열기 전, 네이버가 열린다. 로그인하고 새 창을 연다는 명목으로 블로그에 들어간다. 블로그가 뜬 창, 즐겨찾기가 모여있는 곳에서 브런치를 찾아 누른다. 글쓰기를 클릭한 후 한 줄 쓴다. 바로가기를 눌러 한국어 맞춤법을 미리 열어 놓아야겠다. 필요하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새 창을 보고 있다. 혼자서 휙휙 화면을 바꾸며 무언가 내가 좋아할 무언갈 곰살맞게 보여준다. 약장수처럼 화려한 몸놀림으로 눈길을 끈다. 네이버가 주는 쇼핑 정보는 친절을 가장했지만 자발적 선택이 아닌 강매에 가깝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은 자동으로 클릭.
에이 속았네. 포토샵이 만든 반인반조(?) 인조인간이었네. 어? 이쁜데? 뭐? 7만 원? 헐…. 비싸다. 원피스가, 원피스 이쁜 게 있나? 플레어스커트 하나 사고 싶은데…. 어차피 안 살 거니까 구경이나 좀 할까?
글이 막힌 것도 아닌데 머리나 식힐 겸 산책하러 나가는 사람처럼 인터넷 옷 가게를 부지런히 손품 팔고 있다. 방귀가 잦으면 똥 싸기 쉽다는 속담이 있지. 이렇게 둘러보다 보면 어느 순간 비밀번호를 누르며 원클릭 결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곧 조카의 결혼식도 다가오는데. 물론 그 핑계로 셔츠라도…. 안되면 예쁜 고무줄이라도…. 라는 식으로 욕망이 꿈틀대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게 '조카의 결혼식 때문'이라는 한 문장으로 시원하게 결말 나는 거였나? 아니, 나의 쇼핑 중독은 마트에서 우유라도 사야 풀렸다. 살 것도 없으면서 신기한 거 새로 나온 제품 못 보던 품목이 있을까 구석구석 훑곤 했다. <이 마트에 내가 모르는 제품이 없게 하라> 무슨 생활신조 같다. 그러다 계획에도 없던 무언가가 담기기도 한다.
쇼핑만이 빈자리를 채워주리라 기대하며 열중하던 과거의 나와는 좀 멀어졌다. 근데 이별했다고까지는 말 못 하겠다. 그저 귀한 시간을 멍하게 또는 헛되이 보내기나 하는 존재로. 당장 해야 할 일들도 하지 않는, 게으름으로 보이는 무기력함과 짝지처럼 붙어있는 공허함을. 무의미하게 느껴진 삶을 원클릭으로 채워줄 것 같은 느낌이 순간적으로, 그러니까 충동적으로 들곤 한다. 쇼핑사이트를 돌고 있는 나, 자연스러운 진행이다.
의욕이 들지 않으면 잠 속으로 숨었다. 무기력한 기분이 들면 '눈으로 구경만 할 거'라며 쇼핑 사이트를 켰다. 글을 쓰면서 생긴 의욕과 의지는 충동적인 무기력(충동적인데 무기력이라니….)이나 자책 또는 죄책감을 동반하는 중독을 거의 치료해 주었다. 이젠 정상이다. 보통의 정상인도 어느 정도의 우울감이나 강박 같은 건 갖고 사니까. 그 정도로 조절도 되는 것 같다.
문제는 언제나 약해져 있을 때. 허점이 보일 때다. 과제와 시험에 시달릴 때, 명절 동안 기름 냄새에 뇌가 정복당했을 때와같이 특이 사항이 있거나 몸이 자동으로 피로도에 시달리면 슬그머니 뇌마저 동조해 버린다. 온갖 유혹에 쉽게 굴복한다. 행동 중독 또는 물질 중독으로.
글 한 꼭지 쓰면서 인터넷을 몇 번이나 전화기를 얼마나 켜댔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저녁 식사는 마쳤고 설거지도 끝냈으며 책도 좀 읽었다. 매일 4시간 이상 글과 관련된 행동을 하지 않을 거면 글 쓴다고 하지 말라던 어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뭐 시간은 채운 거 같다. 앉아 있었고 쓰는 척했다. (오후는 밤이 되어 있다) 그 덕에 글은 겨우 마쳐가지만 내 중독은 마쳐갈 기미가 없다.
내 글도 언젠간 단단해질 때가 있길. 중독도 충동도 글 속에 녹여 잘 버무리면 그것들은 사라지고 -도로시가 동쪽 마녀를 죽이자 빨간 구두로 남겨졌듯 -활자로 남겨지면 좋겠다. 그럼 내 중독도 편안함으로 내려앉고 충동을 버린 모습으로 굳어져 단단한 나로 거듭 태어날 테니. 중독 총량의 법칙이 있어 없어지는 게 안 된다면 나쁜 중독이 모습을 바꿔 쓰기 중독으로. 중독은 중독이지만 자신을 풀어 유연하게 만드는 모습, 풀린 털 뭉치가 되어 필요한 스웨터로 태어나길 바란다. 물론 중독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로 마쳐야겠지만 말이다. (혹시 제 말이 들리신다면 쓰기 중독에 걸리게 해 주세요~~. 예? 근데 누구한테 하는 말이니?)
바다 뷰 주차장. 산꼭데기 오밀조밀 동네.
산꼭데기까지는 아닌데 언덕 까꼬막까지 올라가야 있는 국숫집입니다. 시댁 간 김에 외식 함 했습니다. 국수를 먹으며 저 아래 바다까지 볼 수 있습니다. 국수 중독이라 기회만 있으면 먹습니다. ㅎㅎㅎ 아 지금 자정을 막 넘긴 시간 배가 슬 고파오네요. 어여 자야겠습니다.
오랜만에 보고 그린 그림. 패드로 그려봤습니다^^ 따라 그리기는 패드가 좀 짱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