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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일 블루 Nov 13. 2023

바텐더의 일기(2)

: 가까운 곳과 먼 곳 그리고 캘리와 카스의 차이.


처음부터 읽으시려면
https://brunch.co.kr/@paleb1ue/8


*


이 글을 적을 시점에는 두 번째 출근 날의 기억이 희미하다. 다음부터는 피곤하더라도 글감을 정리하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출근 전에는 1편에서 썼던 갓파더와 아마렛토라는 리큐어에 대해 공부했는데 다음부터 쓸 때는 노트에 적은 것들을 옮겨 적어가면서 쓰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기장이 진화하고 있는 기분이네. 사실 매번 쓸 필요야 없겠지만 역시 쓰는 사람의 욕심이다. 가능한 하나라도 더 많이 기록을 하고 싶어 하는 욕심. 가능하면 매번 출근할 때마다 써보고, 아니면 역시 일주일의 기록으로 퉁칠 수밖에.


아무튼 두 번째 출근 날, 구두를 신고 출근한 건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 같다. 역시 몸으로 체감한 노동은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나는 평상시엔 운동화만 신고 다니는 편이었는데 엄마 구두를 빌려서 신고 출근하는데 얼마나 아프던지. 이렇게 바텐딩을 해야 한다고? 눈앞이 깜깜하고 발이 자꾸 아팠지만 어떻게든 그날도 열심히 일을 하면서 견뎠던 것 같다. 그리고 이날은 지거링에 대해 배웠다. 전에 일하던 곳과는 완전 다른 스타일, 좀 더 섬세한 동작을 요구하는 동작들 때문에 연습이 많이 필요했던 것 같아 조금 풀이 죽었다. 이날 마감은 나와 가장 오래된 선배님 둘이서 하는 날이었는데. 선배가 갑자기 퇴근 마치고 우리 바에는 가까운 곳과 먼 곳이라는 암호가 있다고 말해줬다.


가까운 곳은 24시간 순댓국 집이었고 먼 곳은 김치찌개 종류의 찌개집이었는데 둘 다 맛있다고 했다. 가까운 곳이 생긴 건 얼마 되지 않은 일로 바 회식의 역사는 대체로 먼 곳에서 이루어졌다는 얘기였다. 재밌는 건 둘째치고 배가 너무 고파서 오늘은 가까운 곳이라도 좋다고 했지만 구두 직직 끌어가면서 결국 찌개집으로 들어갔다. 역시 야식은 좀 얼큰한 감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았고 아무리 피곤해도 고기와 얼큰한 국물 조합은 우선수위가 될 수밖에 없지. 


" 평상시에 많이 먹어요? "

" 아니요, 저 그냥 적당히 먹어요. "

" 그럼 김치찌개 3인분에 고기 추가할게요! "

" ……? "


사실 많이 먹는 편은 아닌데 넉넉하게 주문해 주신 선배 덕분에 비장하게 숟가락 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들에서도 업무의 연장선은 아니겠지만 이것저것 많이 배우기도 했다. 캐주얼 바라는 말은 요즘에 잘 쓰지 않는다는 점, 예전에는 보틀이 10병 정도만 있어도 몰트바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 바에 오는 손님들이 바텐더보다 잘 알더라도 기죽을 필요는 없다는 것, 취향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의 수준을 점점 발전시키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오는 김치찌개를 퍼담으면서 열심히 들었다.


첫 미니 회식에 첫 술은 캘리를 시켰는데. 맥주 마시면서 한 시간쯤 얘기하다 중간 타이밍에 카스를 한 병 더 시키는 것을 보고 갑자기 궁금해졌다.


" 캘리랑 카스랑 뭐가 달라요? "
" 음, 카스가 좀 더 구수하지. "

" 아 진짜요? "

" 둘 다 좋아해요. "


그 이후로 선배는 캘리는 생맥주가 진짜 맛있는 곳이 있었다고도 말해주기도 하고, 이래저래 바에서 일하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나는 얌전히 듣다가 추가로 시켜주시는 계란말이까지 넉넉하게 먹고 일어서면서 생각을 정리했는데. 오늘의 이 별 거 아닌 에피소드에서 조차 배울 게 너무 많았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10년도 되지 않았는데 바뀌는 바의 분위기들이라던가, 좋아하는 것들을 심도 깊게 파는 사람들은 이제 정말 전문직 하고 차이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이를 테면 커피가 그렇고, 이를 테면 칵테일이 그렇고, 이를 테면 보틀이 그렇고. 바텐더는 넓고 깊게 알아야 한다는데 난 정말 한참 멀은 것 같다. 


맥주만 해도 그런데 선배는 카스와 캘리를 좋아하지만 사실 난 소맥으로 말아먹는 걸 더 좋아한다. 테라에 진로. 취향은 정말 다양하고 사람들은 술을 좋아한다.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 바람에 삐꺽이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올 겨울엔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겠다는 생각에 조금 설렜던 것 같다. 이건 뚜렷하게 기억이 나서 꼭 적고 싶었던 부분이다. 바에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나도 역시 이 일을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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