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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정신적 능력과 나이듦 그리고 죽음에 대한 잡설

나이듦은 축복인가 슬픔인가?

by 글 써 보는 의사


점점 몸과 정신 능력의 감퇴를 느낀다.


20대 때 기억력 순발력 판단력 논리력 예민함 정밀함 어휘력 집중력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그때는 그 정신의 능력을 전혀 활용할 줄 몰랐다. 소중한 줄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때는 정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활용하기 위해 기본 전제가 되는, 감정과 이성을 조절하고 절제하는 능력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걸핏하면 감정에 휘말려 들고 정신을 낭비하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늙을 줄은.


40대 중반이 된 지금, 암기력, 단어 회상력이 상당히 많이 떨어졌고, 대화하는 중 이전에 하던 얘기에서 딴 길로 빠지면 전에 대화하던 주제가 이제는 아예 기억도 안 난다. 3초 전에 하려던 얘기도 집중하고 잡아놓지 않으면 잊어버린다. (그러나 다행히도 생각의 이어짐은 퇴행하지 않았다)

생각이 속도가 너무 느려졌고, 집중력, 순발력, 판단력도 상당히 떨어졌다. 정신의 예민함은 이제는 예민하다기보다는 지쳐있달까.


(별개의 얘기지만, 신경계의 퇴행이 다른 사람보다 빨리 진행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끔 이 점이 약간 두려운데, 정신 능력뿐 아니라 몸을 쓰는 능력도 20대부터 급격히 쇠퇴함을 느꼈는데, 또래보다 객관적으로도 진행이 빨랐다. 이를 통해 볼 때 나는 신경계가 다른 사람보다 취약한 것 같다. 게다가 수면 장애와 알코올은 그런 신경계 퇴행을 촉진시킨 것 같다. 이로 인해 고급 단어를 쓰기가 어렵다. 과거 모 시인이 뇌출혈로 어휘력을 잃고 기초 어휘로 돌아가게 됐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오히려 시가 나아졌다는 말도. 뇌출혈을 앓았던 것은 아니나 나 역시 어려운 단어를 쓰기가 좀 어렵다. 쉬운 단어로 쓰는 게 편하다. 이런 전반적인 기능 저하 때문에 20대 후반에 이상해서 머리 MRI를 찍어본 적도 있다. 결과는 '약간의 의심 병변은 있으나 정상으로 보인다' 였다.)


이렇게 기초적인 정신의 능력들은 많이 퇴행했지만 정신을 통제하는 능력, 스스로의 감정, 생각을 파악하는 능력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졌다.

그리고 생각과 생각을 연결하고 그것을 통합하고 그를 통해 직관을 얻는 능력도 나이가 들며 크게 계발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보다 지금이 더 만족스럽다. 지금 얻은 능력들을 잃는 대신 몸과 정신이 짱짱하던 20대로 돌아가게 해 준다 해도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나는 내 정신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좀 아니까.

그때는 아예 몰랐고, 어느 누구도 그런 부분에 대해 조언해주지도 않았다. 참 오래 걸렸다. 길을 찾아가기까지.


게다가 최근 꿈을 적어 나가며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느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안에 절대 나에게 등돌리지 않는 또 다른 나를 느꼈다고 해야 하나? 이 '나'는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나와는 다르다.

꿈속에서 또 다른 나와 소통하고 그를 통해 나 자신을 점검하고 비평받고 보완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 나는 꿈으로부터, 세상 속에서 내가 만날 수 있는 그 누구에게서보다, 제아무리 현명하고 따뜻한 사람에게서보다도 더 깊고 신뢰할 수 있는 조언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았다.



생각해 보면 정신도 몸도 체력도 점점 쇠퇴해 감을 느끼지만, 그리고 워낙에 예민하고 모든 걸 한꺼번에 생각하는 성격이라 신경계가 지칠 만큼 지쳐버렸음을 느끼고 있지만(마치 40년을 24시간 풀가동해 온 전자기기나 컴퓨터처럼 과열된 듯하다), 다행히도 이제 스스로 식히는 법을 터득하고 있고, 쓸데없는 기능은 잠시 꺼둬 과열 자체를 줄이는 방법도 익혀가고 있다.


내 정신의 처리 한계도 전보다 훨씬 더 잘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적절한 조절도 쉬워지고 있다.

말 그대로 잘 단련되고 오랫동안 경기한 완숙한 운동선수가, 자기 몸을 잘 알아 컨디션을 예측하여 조절하고, 운동 능력은 전보다 떨어질지언정 그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운용하는 법을 알 듯이.


아이러니하게도 정신적 능력이 퇴행하였기에 오히려 정신의 통제와 운영 능력을 크게 배우게 됐다.

마이클 조던 역시 20대 때의 괴물 같은 운동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에 대처해 다른 플레이스타일을 익혔다. 그리고 오히려 더 뛰어난 선수가 됐다. 마찬가지다. 능력의 크기보다 그 능력을 적절히 조율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가수로 치자면 성대의 능력은 떨어졌으나 노래는 오히려 더 깊어졌달까?

지난 일 년간 브런치에 자유롭게 글을 쓰면서 그 모든 연결, 통합, 통제, 운영 능력들이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점점 더 차오름을 느낀다.

나 자신의 모든 것들을 폭발시킬 즈음이 오고 있음을 막연히 느끼기도 한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느낌은 나 자신에게 활력이 된다)

마치 100미터 출발선에서 출발 신호만 기다리는 달리기 선수의 단단하고 핏발 선 팔뚝처럼 말이다.

40여 년의 삶이 용수철처럼 단단하게 응축돼 당장 튀어나갈 것 같은 기분.


좋은 기억 나쁜 기억, 심지어 쓸데없다 생각한 모든 경험이 그 단단한 팔뚝이 되었다.

때때로 선수는 코치가 왜 이런 훈련을 시키나 쓸데없이, 라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기를 뛰고 나면 알게 된다. 코치의 선견지명을.

그렇듯 나의 의도, 계획과 상관없이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모든 경험은 어떤 위대한 코치가 마련한 훈련이었다.


지금 내게 딱 필요하다고 느꼈던 결정적 경험들이 단단한 다리 근육을 만들었다면-이것들이 빠르게 달릴 내 다리가 되어줄 거야 알았다면,

쓸데없다 생각한 경험들은 크라우칭 스타트를 자세를 잡고 버텨주는 단단한 팔뚝의 근육이 되어 줬다. 아니, 도대체 달리기하는데 상체 근육이 왜 필요하지 투덜댔지만, 막상 스타트 자세를 잡고 보니 강한 상체 어깨 팔 근육이 없었다면 자세를 잡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자세를 취해 본 분은 알 것이다. 굉장한 상체 근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거리 선수들의 상체를 봐도 알 수 있다. 그 완벽하게 조화된 근육의 모양, 크기, 질감)

젊었을 땐 다리 근육만 컸고, 지금 다리 근육은 줄었으나 대신 상체 근육이 그만큼 발달됐다.


오냐, 신호만 떨어지거라,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튀어나갈 것이다.


생각해보면 잃어버린 것도 많고(피부 탄력 건강 모발 정신적 능력),

현재도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직도 대학 동기들에 비해 자유롭지 못한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나는 과거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좋다. 지금보다 더 여유롭고 마음의 걱정도 없고, 젊고 쌩쌩하고 겉표면도 더 그럴싸하고 똑똑했던 시절이 분명 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

가만 돌이켜보면 언제나 아무리 힘들어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


다행이다 감사한다.

가장 큰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만큼, 그보다 더 큰 걸 얻고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맞다, 나는 과거보다 현재에 만족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외부 조건의 문제가 아니다. 조건은 오히려 지금이 더 안 좋다.

그보다는 내면의 문제다.


나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매일마다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 더 만족할 것이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좋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자.

잘하고 있다.



내 직업적 능력 역시 점점 발전됨을 느끼며 더 나아지리라 믿고 있고, 무엇보다 그 안에서 점점 더 깊은 가치를 발견해 나가고 있으며, 그 안에서 나라는 사람의 능력을 통해 내 삶의 가치 또한 만들어나갈 수 있음을 점점 느낀다.

나는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들이 더 풍요롭도록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많은 걸 희생하고 돌아가셨다. 그 희생의 열매가 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보답해야 한다. 내 능력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나는 너무나 많이 받았다. 지금도 받고 있다.

이 넘치는 수혜를 나는 돌려줘야만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한 사람이 가진, 남들과 다른 모든 부분은 세상에 다시 돌려주라고 주어진 것이다. 나 역시 그것으로 기여를 해야 한다.

이 우주의 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수많은 능력이 쇠퇴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각 나이마다 그 나이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능력들이 있다. 제아무리 천재적인 20대라 하더라도 40대를 따라갈 수 없는 어떤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이 능력은 그 나이가 된다고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 능력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시간과 시련, 온갖 경험이 주어진다.

나이가 들어 세상과 타인으로부터 가치를 상실하는 이유는 바로 그 나이에만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40대에 40대의 정신적 인격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40대지만 그저 20대처럼 보이기에만 급급하다면, 다시 말해 과거의 잃어버린 것(젊음 따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그것을 보존하기만 바쁘다면 그 삶은 당장은 20대가 보기에 오, 다른 40대와 달라 멋있는데, 쿨한데~ 라며 추켜세워질지 모르겠지만 결국은 자기만의 가치와 쓸모를 갖지 못한 채 버려진다. 어쨌든 20대는 아니니까.


50대 60대도 마찬가지다. 20대처럼 지낼 필요는 없다. 과거 잃어버린 것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내세우며 그걸 유지하기 위해 애쓸 필요 없다. 과거의 것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보다 그 나이에 맞는 새로운 능력을 갖추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그 나이대만이 가질 수 있는 무엇을 보여주면 나이가 들어도 나만의 가치를 보여주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 깊이와 경험으로부터의 해석이다. 그냥 경험만 해선 안된다. 그것으로부터 가급적 깊이 얻어야 한다. 나이가 들고 정신적으로 깊어질수록 경험의 해석 능력도 올라가며, 이것은 점점 나이가 들수록 독보적인 값어치가 돼 간다.

그러므로 젊음을 잃어도 그 성숙된 가치를 보고 찾는 사람들은 계속 생긴다.

이러기 위해서는 계속 머무르지 말고 자신을 단련하고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 기계적인 행위에 생각 없이 머물러만 있으면 안된다. 그러면 어느샌가 나는 사회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한다. 분명 열심히 살았는데도.


나만의 가치는 항상 그 나이대에 있다. 젊음의 능력이 최고치인 영역에 있지 않다. 그리고 그 나이대의 능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러므로 지나간 세월의 잃어버린 것들을 한탄할 시간은 없다. 열심히 정진하고 어느 날 돌아보면, 젊었을 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훨씬 더 나으리라.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을 보면 생물학적 이행대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행대에는 새로운 생물 종이 출현해야 한다.

중년의 시기 역시 그렇다. 과도기 변화의 시기.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라는 책에서도 이때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한다고 나온다. 그대로 살든, 기존의 삶의 형태를 버리고 완전한 변혁을 이루든. 중간은 없다고.

그러나 나는 꼭 그렇게만 생각지는 않는다. 분명 완전히 새롭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삶을 틀을 유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변화는 단순히 외부 틀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면의 유리창을 바꾸는 게 더 핵심적이다.


기존의 관습을 버리고 하던 대로 하던 걸 버리고, 이제 새로운 무엇을 해야 한다. 기존의 생각을 접어야 한다. 새로운 생명을 싹 틔워야 한다. 당연히 두려움이 함께 따라온다. (함께 따라온다는 게 중요하다, 두려움을 무찌른다가 아니라. 두려움은 변화의 첫 신호다. 반가운 소식이다. 다시 말해,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변화가 아니다.)

그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느끼면 설렌다.



정신과 시간과 에너지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20대 때는 이를 몰랐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에너지와 정보의 관점에서 여러 일들을 해석하게 된다. 정신적 능력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에너지가 사라진 만큼 그것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은 늘어났다.


현재 나는 시간은 일단 양이 아니라 질로서 주관적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아침 30분은 저녁 2시간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는 에너지 수준과도 관련이 깊다. 그러므로 거기에 맞게, 그 시간과 에너지를 고려해 일이나 독서 등등을 배치한다. 이를 잘 해결할 때 정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운용할 수 있고, 비록 그 하루하루 차이는 얼마 되지 않으나, 이런 차이가 일년쯤 누적되면 어마어마한 결과의 간극을 낳는다.

만약 하고 싶지 않고 에너지 소비만 심하나 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가급적 힘을 빼고 영혼 없이 한다. 거기 에너지를 쏟느라 다른 일에 에너지를 쏟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내 평상시 정신적 에너지는 한계가 명확하고 생각보다 그 용량도 작다. 이제 더 이상 모든 걸 다 할 수 있을 듯 내 능력을 과대평가할 이유가 없다. 과대평가할수록 내 손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상시 혹은 고도의 집중 상태가 될 때는 다르다. 이때는 밤을 새도 정신이 유지된다. 이런 경우는 예외이다. 그러나 매일 이런 식으로 산다면, 장기적으로는 좋지 못할 것이다.



한 가지 덧붙여,

인생은 내 의지나 의도와 달리 벌어진 예측 불가능한 일들,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훈련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훈련의 최종점은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비로소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불확실성을 외부적으로 제거하는 데만 몰두한다. 그 불확실성을, 예측 불가능한 환경과 결과들을 내면에서 수용하고 처리하는 능력을 기르기보다, 모든 해결법을 자신의 바깥에 두고 그 바깥의 환경을 통제하는 데 온 인생을 쏟아붓는다. 한 가지를 통제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곧 또 다른 게 등장한다. 그걸 통제하면 다시 끝날 줄 알지만 다른 문제가 또 발생한다. 끝도 없다. 통제할 게 많아질수록 정신적 시간적 소모도 심하다. 점점 시간은 없다. 평온하려고 외부 환경을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통제하느라 오히려 내면이 쉴 새 없다, 통제불능이다. 불안은 점점 심해진다.

보험을 예로 들자면, 불안하니 이 보험 들고, 저것도 혹시 모르니 다시 보험 들고, 그러다 옆 사람이 넘어가는 걸 보니 또 불안해 또 하나 들고.

그러나 그렇게 환경을 통제하며 불확실성을 피하려다 결국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확실한 선고를 마주하게 된다. 이번에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현실적으로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 최후의 불확실한 세계를 언젠가는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살아가며 겪는 모든 예측 불가능한 사건과 시련들이, 내 의지와 통제를 벗어난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라고 마련된 배려라고 생각한다.

한 번 상상해 보자. 차근차근 수련되지 않은 마음이 어느 날 갑자기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불확실성,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과연 그것을 받아들이고 처리하기가 쉬울까. 아니면 벌벌 떨고 당황하게 될까.


운동선수도 차근차근 훈련 강도를 높여 힘을 기른다. 힘이 생길수록 더 힘든 훈련을 한다. 그렇게 실전을 이겨내도록 외부 환경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든다. 외부 환경을 편안하게 통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편하게 한다.


나이 듦의 가장 큰 정신적 능력은 어쩌면 여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라이테 작가님의 감사함에 대한 글로부터 시작됐다.

그 이전에 선행과 사랑과 자비에 대해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말로 꼭 필요한 일인지, 또 의무적으로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일인지 따위.

결론적으로 칸트의 정언명령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억지로 의무로 하는 일에는 부정적인 정신의 영향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일을 전혀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이건 사과 자르듯 간단히 얘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때로는 억지로도 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큰 관점에서 자발적으로 흐르는 정신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최근,

감사는 보다 큰 무엇에서 와야 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아주 큰, 내 노력과 상관없이 나에게 무언가 무상으로 주어짐을 느낄 때, 그것이 기쁨이든 무엇이든 바로 그때, 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됨을 깨닫게 됐다.


그러다가 공교롭게도 라이테 작가님의 글을 읽게 됐고, 40대의 나에 대해 갑자기 생각하게 됐다.

그것이 이 글로 이어졌다.



지금 내가 선 자리, 이 시기, 내 주위의 모든 것은 결코 나의 노력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물론 나도 노력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내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내 나이가 얼마나 축복인지 깨닫게 됐다.


나이듦은 인생의 무상함이 아닌, 보다 깊은 샘물을 맛보는 일임을 알게 됐다.

인생은 무상하여 가득찬 줄 알았던 인생의 밭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되지만, 사실 그 허허벌판 아래로 아주 깊은 곳에 형용할 수 없는 맛이 나는 샘물이 흐르고 있다.

그것을 길어 올리는 건 나의 몫이다.


그러나 그 물은 애초부터 있었다.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나의 노력이란 그저 그 물을 끄집어올리는 정도뿐이다. 내가 샘물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무상으로 주어졌기에. 심지어 어느 누구에게나 무상이다.


다행히도 정말 감사하게도, 나는 과거에 잃어버린 것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한 적이 거의 없다.

분명 나는 많은 것을 잃었고, 내 재능이나 능력들의 상당 부분도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으로 얻은 것들이 있음을 자연스레 느끼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잃어버림으로 인해 그 잃어버린 능력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을 얻게 됐다. 잃지 않았더라면 결코 몰랐을 빛나는 샘물들이다.


이 글은 그 흔적의 일부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더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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