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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써 보는 의사 Oct 13. 2024

당신 등 뒤에 붙어있을지 모를 귀신 이야기 4- 산속

재미로 써보는 끝날 줄 알지만 끝나지 않을 귀신 이야기



4



"참 신기해. 니 헛소리는 20년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니.“

우리는 계곡물 앞에 서 있었다. 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두꺼운 구름 사이로 태양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빛과 어둠이 교차했다. 습도가 낮아서 그런지 구름 따라 햇볕 따라 차다 덥다 왔다갔다하는 날씨가 조울증에 걸린 것 같았다.

A가 비아냥거리는 동안에도 정신 나간 태양은 두 번이나 몸을 숨겼다가 나타났다.   

“난 니 주둥아리가 더 신기해. 20년 동안을 털었는데 아직까지 숨이 붙어있는 걸 보면 운빨 하나는 타고났나 보다."

A의 비아냥에 내가 대답했다. 보다 못한 B가 나섰다

"이제 그만해라, 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들이. 정말 지겹다 지겨워."

"저 새X가 먼저 시비를 걸잖아 항상. 이렇게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반년 전 A가 벌인 일이 떠올라 감정이 격앙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짐 여기 귀신이 붙어 있다 그 말이지?"

A가 방심한 내 왼쪽 어깨를 꽉 움켜줬다. 키가 나보다 10cm는 더 큰 데다 한때 유도도 했었던 고릴라 같은 악력이 내 어깨를 파고드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동안 애써 참아왔던 비명이 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악!! 이 미친 새X가..."

찔끔 나오는 눈물을 겨우 참았다. A에게 달려들 뻔한 나를 B가 겨우 말렸다. B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여기 왜 왔지? 내가 니들 엄마고 아니고. 이제 적당히들 해라. 나도 이럴 시간 없어 지금."

B의 얘기를 듣고서야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혹시 안 하던 일을 갑자기 하거나 다치거나 하신 적은 없으시지요? 원인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뾰족하게 웃으며 의사가 말했었다.

속으로 쌍욕을 삼키며 주위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풍경은 그때 그대로였다. 그대로여도 너무 그대로였다. 햇빛마저 왔다가 떠나지 못하는지 계곡물에 눌어붙어 있었다.


우리는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동선을 쫓았다. 그러다가 각자 흩어졌다. 뭐라도 이상한 건 없는지 찾아볼 심산이었다. 여기저기 훑고 다녔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자 전에 텐트를 쳤던 자리에서 나는 담배 하나를 꼬나물었다. 시큰거리는 어깻죽지를 붙잡고.

때마침 B가 왼쪽 손목을 주물럭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손목은 좀 어때?" 이제야 눈에 들어온 B의 손목을 보고 내가 물었다.

"그나마 왼쪽이어서 괜찮아. 너는 좀 어때?"

"나는 너처럼 팔 쓸 일은 없으니 견딜 만해. 너는 손목만 아프니? 팔이나 어깨는 괜찮고?"

"응. 그냥 손목 주변만 좀 시큰해."

B가 왼쪽 손목을 까딱까딱 흔들어 보였다. B의 통증 양상은 변하진 않나 보다.

"둘러보니 별건 없니?" B가 물었다.

"응"

B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이젠 너도 좀 받아들여. 니가 이해해야지."

"뭘?" 퉁명스럽게 내가 대답했다.

"알면서 그래."

"알긴 뭘?"

"진짜 몰라서 그래? 너 기분 나쁠까 봐 나도 그동안 일부러 말을 안 꺼냈다만, 니 오해야."

"오해는 무슨 오해? 내가 다 봤는데. 저 새X는 인간 말종이야. 내가 아직까지 쟤를 만나는 이유는 딱 하나. 너, 너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어. 너 아니었음 진작 끝났지, 저 새X하곤."

B는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 사이 햇빛이 몇 번 B의 얼굴과 내 가슴을 훑고 지났다. 나는 항상 주저리주저리 혀가 길었지만 B는 쓸데없이 말이 긴 편이 아니었다. 내 착각일까? 가만히 나를 쳐다보는 B의 표정이 꼭 어머니 같았다. ‘니가 그래도 친구 하나는 잘 뒀지.' 어머니가 종종 B를 두고 말씀하시고는 했었다. 그러다 마침내 어머니가, 아니 B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사실 얘기하지 말랬는데, A가 그러더라."

"뭘?"

"이상한 걸 봤다고."

"......"

"허리가 아프고 묵직한 게, 허리춤에 무슨 가방이라도 붙어 있는 느낌이 들어서, 거울을 봤다고 그러더라."

거울? 거울이란 단어에 반사적으로 귀가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내 왼쪽 어깨를 흘낏거렸다. 그 녀석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내 목덜미를 파먹고 있을까? 나는 그 녀석이 우리 둘의 대화를 들을 것만 같아 낮고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주먹 만한 여자애의 얼굴을 봤다나..."

"너는? 너는 그런 거 못 봤어? 혹시 악몽 같은 건 안 꾸고?" 나는 곧장 B에게 쏘아붙였다.

"나? 나는 글쎄... 잘 모르겠는데"

B의 얼굴이 뭔가 두루뭉술했지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A는 봤고, B는 못 봤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머릿속에 순서대로 그려 봤다.

그 녀석은 갑자기 왼쪽 어깨에 나타났다. 어깨에 붙어 있고 발톱을 날개뼈에 박고 있다.

처음에는 꼼짝도 안 했는데 어느샌가 꼬물거리기 시작 → 입술을 오물거리고 → 눈에서 불꽃 → 그리고 눈알이 돌아감 → 눈알이 돌아가고 나면 이동을 한다. 그리고 꿈에서 본 불기둥. 이 또한 연관성이 있는가?

이 과정들이 규칙적인 패턴인지, 또 이 과정들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지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는지도 아직은 잘은 모르겠지만, 규칙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주변 상황과의 연관성을 따져보는 접근이 딱히 불합리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설령 가정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렇게 손해 볼 상황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생각의 속도가 중요하다. 너무 빠르면 이성의 분석력이 못 미치고, 너무 느리면 분석의 늪에 빠져 직관을 놓친다. 가을 하늘 구름이 부드럽게 흘러가듯, 흘러가는 구름이 태양을 삼켰다 뱉어냈다를 반복하듯 생각을 흘려보내야 한다.

나는 B의 얼굴을 쳐다봤다. A는 봤고 B는 못 봤다. 왜?

흘러가는 구름에 맞춰 햇빛도 B의 얼굴을 흘러가고 있었다. 그 뒤에 걸린 계곡 물소리. 빨리 돌린 사계절 자연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계절이 바뀌듯 빛과 시간이 흘러갔다. 잠시 모든 풍경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B의 뒤편 계곡물에서 지나가는 햇빛을 따라 스쳤다 사라지는 반짝임. 다시 반짝이고, 사라지고.


그래, 돌.


계곡 물속에서 돌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반복하고 있었다. 마치 모르스 부호처럼. B는 그날 돌을 던지지 않았다. A와 나만 돌덩이를 집어던졌다. 나는 거의 B를 밀치듯 하며 계곡물을 향해 갔다. 돌은 거기에 있었다. 내가 던졌던 그 돌이었다. 모양과 색깔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이 돌을 던졌더라. 나는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그때 상황이 머릿속을 한바탕 훑고 지나고 나자, 내가 던진 첫 번째 돌덩이에서 1미터쯤 상류 쪽으로 깊은 검은 구멍처럼 움푹 파인 곳이 눈에 들어왔다.

계곡 바닥에 무슨 구멍이지? 그땐 왜 몰랐지?

아무래도 이상해서 나는 신발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봤다. 등 뒤에서 쟤는 뭘 하고 있나 쳐다보는 B의 시선이 느껴졌다. 가까이 가보니 그것은 구멍이 아니었다. 돌이었다.   

기억났다. 이건 아마도 A가 던진 바위만한 돌이었다. 무식한 새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들었던 걸까? 그 돌은 색깔과 질감이 주위 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짐승이 떼먹기라도 한 듯 군데군데 파인 표면과 태양마저 마주보기를 거부했는지 빛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무튀튀한 표면.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도무지 차원을 가늠할 수 없는 안개처럼 입체감마저 없었다. 그래서 멀리서 봤을 때 움푹 파인 구멍처럼 보였었나 보다. 내가 기이한 사건 사물에 관심이 있는 편이지만, 이건 기묘하다고 해야 할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적합한 표현을 찾기 힘들었다.

때마침 멀리서 곰만한 덩치의 낯익은 짐승 한 마리가 구부정한 자세로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A였다. 허리가 영 불편한지 등을 말고 있었다.

"너 마침 잘 왔다. 저 돌 니가 그때 들고 온 거 맞지?"

"모르겠는데" A의 대답이 빠르다.

"보지도 않고 대답하냐 너는?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들어와서 자세히 한번 봐봐. 니가 파먹은 건지, 이 튀는 모양새를 보면 기억이 날 거 아냐."

"가져와봐. 자세히 보게."

"니가 들어와. 크기를 봐라. 난 너처럼 무식하지가 않아서 이런 거 못 들어."

"할 수 있어. 난 지금 어차피 허리도 못 펴. 들고 와봐."

항상 입가에 팔자주름이 지던 A의 얼굴에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더 맞받아치지 않고 무릎 앞에 놓인 돌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팔로 돌을 안으며 무릎에 힘을 줬다.

"이걸 어떻게 들라고, 그게 말이..어라?"

돌이 들렸다. 무겁긴 했지만,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A는 그런 나를 표정 변화 없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물 밖에 돌을 내려놨다. 아무리 봐도 이건 계곡의 다른 돌들과는 생김새가 너무 달랐다.

"너 이 돌 어디서 가져왔어?"

"돌이 점점 가벼워지더라고." A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갑자기 그게 뭔 말이야?"

"내가 가져올 때만 해도 꽤 무거웠거든. 근데 들고 내려오면서 점점 가벼워지더라고."

A의 자못 진지한 표정에 나는 별 대꾸하지 않았다. A의 말을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 굳이 더 시빗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으니. 대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 돌을 어디서 가져온 건데? 굳이 뭐 하러 들고 왔어, 이걸?"

A는 대답 대신 계곡 상류 쪽을 가리켰다.

B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A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우리 셋은 계곡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해가 지기 시작하는지 하늘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저건 뭐야 또?"

왕릉처럼 커다란 돌무덤이었다. 그 돌무덤을 철망 울타리가 빙 둘러치고 있었다. 돌무더기의 경사는 꽤 가팔랐지만 돌덩이들이 흘러내릴 만큼은 아니었다. 우리는 좀 더 가까이 접근했다.

울타리 앞까지 다가가자, 철조망 사이로 흘러나오는 냉기가 느껴졌다. 초겨울 한기만큼 차가웠다.

"여긴 뭐야?" 내 혼잣말에 B가 대답했다.

"얼음골 같은데. 전에 밀양에 갔을 때 비슷한 델 봤어. 돌들이 쌓여있고 냉기가 흘러나오고."

여름 끝 무렵이라 그런지 냉기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반팔을 입고 온 터라 팔에 소름이 돋고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서 천마총만한 돌무더기를 철책을 따라 걸으며 빙 둘러보는데 멀리 왼편 구석에 익숙한 검은 구멍이 눈에 띄었다. 계곡 물속에서도 봤던 형태. 다만 이번에는 훨씬 컸다. 돌무더기 끝에 놓여 있는데 작은 블랙홀처럼 공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흔들거리는 돌덩이들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그곳을 향해 가는데, 뒤따라오던 B가 갑자기 A와 나를 불러 세웠다.

"잠깐, 여기 좀 봐봐."

B의 손가락이 방금 내가 지나간 철책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슴 높이쯤에 낡은 플라스틱판이 매달려 있었다. 너무 낡아서 못 보고 지나친 것 같았다. 닳고 닳은 흰색 플라스틱판에는 흐릿하게 글자가 보였다. 뉘엿거리는 붉은 태양빛이 조악한 글자를 비췄다.

'돌을 가져가지 마시오.'

특히 '지‘자는 이미 닳아버릴 만큼 닳아서 얼핏 보면 '가져가시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글자를 읽고 나자 내 몸에 돋는 소름이 냉기 때문인지 께름칙한 기분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나는 곧장 A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돌을 가져온 거니?"

"무슨 문제라도 되나?"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A에게 다시 물었다.

"가져가지 말래잖아. 굳이 이걸 왜 들고 내려온 거야?"

A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리다 다물었다. B는 그런 A의 어깨를 툭 치며 그 옆에 섰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갔지만, A가 이해가 안 되는 짓을 한 게 한두 번도 아니니, 나는 조용히 할 말을 삼키고 검은 구멍을 향해 다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역시 구멍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얹혀 있는 줄 알았다. 거무튀튀하고 움푹 움푹 표면이 파인 커다란 원형 제단 같은 바위. 원의 한쪽 끝은 철책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철책과 맞닿은 귀퉁이가 큰 파충류가 베어 문 것처럼 비어 보였다. 그곳이 A가 돌을 떼간 곳 같았다. 나는 원의 끊어진 곳을 가리키며 A를 쳐다봤다. A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자세히 보니 그것은 하나의 바위가 아니라 여러 개의 돌덩이였다. 마치 바닷속 군체생물처럼 크고 작은 돌덩이들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바위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표면에는 원형 테두리를 따라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다섯 개의 희끗한 반점들이 검은 바위 색깔과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돌덩이 하나하나가 기묘해서 평상시의 나였다면 신기하다고 집어 올려 봤을지도 모른다. 그런 건 또 못 참는 편이니. 그렇게 생각하면 어쩌면 A의 잘못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게 뭘까, 끈적거리기라도 한다면 우주 생명체 블롭(영화)이라고 상상이라도 해보겠건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B가 갑자기 내 옆을 지나 철책 왼쪽 끝으로 걸어갔다.

"여기 웬 계단이 있네."

철책 왼쪽 끝으로 샛길처럼 올라가는 계단이 놓여 있었다. 얼핏 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위치인데 용케도 B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보다는 누군가 지나다니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듯 보였다.

"거긴 올라가지 말지." 큰 돌계단에 발을 내딛는 B를 보고 A가 말했다.

"왜? 넌 올라가 봤어?" B가 뒤돌아보며 물었다.

"아니, 올라가려다 말았지."  

"왜?" 이번엔 내가 물었다.

A는 나와 B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누가 있어, 저 위에"

A가 고개를 까딱이며 계단 위를 가리켰다. 계단 위는 어두웠다. 다섯 계단쯤 위부터는 암흑이나 다름없었다. 좀 전에 봤던 원형 돌무더기처럼 깊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똑같은 돌무더기를 계단 위에 세워 붙인 것 같았다. A의 말에 B는 발걸음을 멈춰 섰고, 나 역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철책 오른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여기서 뭣들 하는가?"

언제 온 건지 중늙은이 한 명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눈꺼풀이 눈동자를 1/3쯤 덮고 있었고, 검은색 흰색 반씩 섞인 긴 턱수염, 꽁지머리에 개량한복 차림이었다. 턱수염은 그나마 숱도 별로 없었다. 나는 항상 개량한복에 꽁지머리는 피해 다녔다. 언제부턴가 우주의 가을을 쫓고 있는 사람들투성이라. 하지만 지금은 피할 곳이 없었다. 우리는 쭈뼛쭈뼛 인사를 했다.

"여긴 댁들이 올 곳이 아닌데."

사투리인 듯 사투리가 아닌 듯 억양에 묘한 리듬감이 있었다. 이 지역 억양인가.

"어서들 가시게. 날도 곧 어두워질 텐데." 안 그래도 하늘이 붉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대꾸를 못하고 땅만 보던 차에 B가 중늙은이에게 말을 꺼냈다.

"이제 곧 내려가겠습니다. 어르신, 그런데 한 가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중늙은이는 그래 말해보라는 듯 B에게 턱을 살짝 내밀었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고, 저 위에는 뭐가 있습니까?" B의 손가락이 계단 위를 향했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구먼."

"네?"

"질문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란 말이네. 왜 여기 오는 객들은 죄다 항상 하나가 아니고 둘인지. 자네들은 물에 뜨는 돌을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아무 대답이 없자 늙은이는 말을 이어갔다.

“산속에 20년을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지. 저 계단 위에는 암자가 있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암자가 있다고들 하는데 나는 가본 적이 없네. 우리 아버지한테서도 들은 얘기인 걸 보면 아마도 꽤 오래됐겠지. 바위가 많은 곳에는 항상 암자가 있기 마련이네. 바위는 지기(地氣)가 아주 강한 걸 아는가? 도닦기로 유명한 곳들은 하나같이 바위투성이지. 세도나, 중국 화산."

늙은이는 우리 앞에 펼쳐진 바위 덩어리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쭉 훑었다.

"그 암자에 거사가 한 명 산다고들 하더군. 그 거사가 한 말이네. 물에 뜨는 돌을 본 자는 가라앉지 않는다고."

역시나 우주의 가을을 찾는 분이로군. 늙은이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밀양 얼음골, 진안 풍혈냉천, 의성 빙계계곡, 제천 능가계곡. 지역마다 이름은 다르지만 얼음 계곡들이 꽤 널려 있지. 그런데 여기는 이름이 없네."

다시 B가 물었다.

"그럼 여기는 뭘 하는 곳입니까? 돌을 가져가지 말라고 써 있던데, 옮기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다시 우주의 가을.

"자네는 물이 직선으로 흐를 때보다 곡선으로 흐를 때 더 빨리 흐른다는 걸 알고 있는가. 물 분자들이 한데 뭉치면 알 수 없는 어떤 작용으로 곡선으로 흐르려고 한다네. 그래서 소용돌이치듯 곡선으로 흘러갈 때 가장 빨리 흐르지, 직선으로 흐를 때가 아니라. 자네들 얼굴을 보니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로군. 물이 소용돌이로 흐르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커서 저 바위만한 쇳덩이도 움직인다네. 직선으로 흐를수록 충돌하고 마찰이 발생하고 그 마찰로 열을 잃어 에너지가 손실된다네. 생각해 보게. 물이 직선으로 흐른다면 왜 사행천이 생기고, 우각호가 발생하겠는가."

이 지리멸렬한 강의는 뭔가, 은퇴한 지리 선생이라도 되는 걸까. B가 다시 질문을 하려 하길래 내가 제지했다. 나도 묻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여름이다. 나는 아직 가을을 맞을 준비가 안 됐다. 그래서 지금 계속 저 얘기를 듣고 있을 여유가 없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늙은이는 스스로 끝을 맺었다.

"돌은 모일수록 가벼워진다네. 모일수록 가벼워지는 게 어디 돌 뿐이겠는가? 오늘은 늦었으니 들어들 가시고, 더 궁금한 게 있거든 날 밝을 때 다시 오시게. 일단은 더 어둡기 전에 내려들 가시게. 아직 자네들은 이곳의 밤을 견딜 준비가 안 됐으니."

늙은이는 독백만 주구장창 늘어놓더니 배설의 욕구를 충족했는지 자기 말마따나 모인 돌처럼 가벼워진 걸음으로 사뿐히 산길을 걸어 내려갔다.







"배고픈데 밥이나 먹고 가자"

이 상황에서도 밥 생각은 나는지 A의 말에 우리는 근처 국밥집에 들렀다. 순대는 얼마나 속이 비어 가벼운지 국밥 위를 둥둥 떠다녔다.

"이제 보니 아까 그 어르신 어디 사는지라도, 하다못해 연락처라도 물어봤어야 되는 거 아닌가?" B 가 말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만 불러 세울 분위기도 아니고." A 가 말을 이었다.

"니가 언제부터 분위기를 따졌니?" 내가 비꼬자, A는 국밥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잘근잘근 만두를 씹었다.

나는 무시하고 국밥으로 숟가락을 가져가려는데 문득 둥둥 떠다니는 순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까 정체 모를 가을 도사가 가을바람 같이 흘려보냈던 말이 떠올랐다.

"근데 아까 너 돌이 가벼워졌다고?"

"그래, 이제야 관심이 가냐?" 내 물음에 A가 답했다.

"아까 그 노인이 물에 뜨는 돌을 본 적 있느냐고 했잖아. 니가 가져온 그 돌이 혹시 그 돌인가?"

"니가 그 돌에 관심 가질 줄 알았지. 모양이 딱 니 스타일이니.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다만, 그 돌은 물에 가라앉아 있었잖아. 그거 더 안 먹을 거면 내가 가져간다. 너는 남자 놈이 참 입이 짧어.“

A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내 국밥을 가져갔다. 식충이 시키. 나는 그냥 내버려 뒀다. 산속에서 단서를 얻기는커녕 머리만 더 혼란스러워졌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 옆에는 큰 거울이 있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그 녀석은 내 왼쪽 목 아래 어깻죽지에 잘 붙어 있었다. 더 이동하지는 않았다. 거울에 비친 A의 허리춤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B의 손목도 마찬가지였다. A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지, 게걸스럽게 국밥을 먹고 앉아 있었다. 저 시키 머리통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 걸까? 도대체 저런 놈이 어떻게 판매 성적이 그리 좋은 자동차 딜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관심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저놈이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리고, 여자친구는 왜 하필, 저런 놈에게 관심을 가졌었는지도.

B는 A가 먹는 모습을 웃기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B와 A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오랜 친구였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합류했다. 우리가 이렇게 클 줄은 그때는 상상도 못했다. 나도 한때는 A와 꽤 친하게 지냈었다. 언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던 걸까? 나는 A가 허리춤에서 무얼 봤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머릿속에 담아뒀으나,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B한테만 한 얘기를 괜히 내가 꺼냈다가 B의 입장이 곤란해질까 싶기도 했고, A에게 그런 질문을 건네는 것이 왠지 도움을 청하는 기분이라 싫기도 했다.

어느새 A의 밥그릇에는 순대 하나만 남아 떠다니고 있었다. 뿌연 국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검은 순대.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돌이 가벼워졌다. 물에 뜨는 돌을 본 적이 있는가.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군체생물 같은 원형 돌무더기.

나는 조만간 혼자 다시 산으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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