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시 한 편이 삶에 미치는 영향
떠나온 집 같은 몸뚱이가 거울 앞에 서 있다
제대로 읽힌 적 없는 몸뚱이
벌거벗은 흉한 몸 위에 시를 쓴다
거룩하게 살지 못해 곳곳에 더럽혀진 흔적을 비로소 읽는다
이미 딱딱하게 굳어버린 흉터를 읽고 쓴다
몸에 새겨진 흉터는 언제나 거울 속에 비침을 알고 그 위에 쓴다
몸의 상처는 곧 마음의 상처임을 안다
습기가 증발하고 나면 곧 지워질 기록일지언정 다시 쓴다
쓰고 다시 몸을 본다
거기 내가 있다
흉터로 벌거벗은 내가 있다
이대로 좋다
출근해서 시 한 편을 읽다가 문득 그냥 뭔가 쓰고 싶어 쓴다. (심재휘 시인의 '옛집'이라는 시였다.)
인턴 때 응급실 당직을 서며 시간 남을 때마다 시선집을 읽었다. 대중성 있는 시 모음집이었다. 유명한 모 시인이 엮고 간단한 감상평을 남긴 형태였다. 시보다 감상평이 더 좋을 때도 있었다.
그때 왜 시선집을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딱히 엄청 읽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시인의 꿈을 품었던 바도 아닌데.
그리고 이후로는 읽지 않았다.
사실 나이가 제법 들기 전까지 책 자체를 잘 읽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거의 읽은 기억이 없고, 2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자주 손에 잡기 시작했는데 그나마도 책장 끝까지 완독한 기억은 거의 없다.
최근에야 끝까지 읽기 시작했다. 워낙 읽는 속도가 느려 한 권에 일 년이 걸릴 때도 있다. 대신에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편이다. 일터, 집, 화장실 각기 다른 책들을 조금씩 읽는다. 애당초 속독이 불가능한 류의 사람이라 여기고, 빨리 읽기는 관둔 지 오래이다.
특히나 시집은 인턴 이후로 거의 못 읽고-아니면 안 읽고 살아왔다. 그러다가 최근 다시 시를 읽는다. 출근길에 한 편씩. 포장된 하루견과처럼 하나씩 까먹기 참 좋아서, 출근길을 나름 알차게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전까지 이해가 되지 않던 시의 몸뚱이가 느닷없이 발가벗겨져 내 눈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세상이 서러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세상과 나와의 멈추지 않는 다툼 때문일까?
시의 맨몸은 부끄럽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시를 읽지 않았던 이유는 내 몸뚱이를 나 자신이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옷을 벗고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벗은 몸에 익숙해지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일부러 거울을 보려는 중이다.
톡 튀어나온 아랫배와 가슴 앞의 튼살, 빠져가는 머리털, 한번 부딪혀 까지면 좀체 깨끗하게 낫지 않는 정강이뼈를 가까스로 덮고 있는 얇은 피부와 그 위로 사라지지 않는 흉터들. 그 흉터들은 내 삶의 흔적이다. 내가 먹고 마시고, 생각하고, 행동했던 그 모든 역사의 흔적.
이제 시를 다시 읽으며 태어날 때부터 내 일부였던 것들에게 인사를 하려는 중이다.
언제쯤 이 탈의는 끝날까?
내 몸이 흙먼지가 될 때쯤일까.
발가벗고 태어난 몸뚱이에 애써 옷을 입히고, 점점 더 화려하고 두꺼운 옷으로 바꿔 입고,
그러다가 애써 입은 그 옷을 다시 벗겨나가고 최후에는 알몸으로 당당히 남겨지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생이 끝날 때 관 속에 누운 그 맨몸을, 내 영혼이 평화롭게 웃으며 바라보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시의 몸뚱이와 내 몸뚱이가 닮아갈수록 시가 더 이해가 잘 된다. 내 옷을 벗고 볼수록 더 감동하게 된다.
시는 나를 옷 벗게 만든다. 오늘 하루 시에 감사한다.
솔직하고 충실한 하루를 살게 해 줌에.
그 벌거벗은 감성이 나에게 힘을 줌에. 그로 인해 내 벗은 몸뚱이가 부끄럽지 않도록 해줌에.
오늘도 웃으며 인사할 힘을 줌에.
고등학교 때이던가. 원태연 시인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어떤 시인 한 명이 떠오른다. 그 시인은 네 번째 발가락이 기형적으로 짧았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가 들이밀었던 발이 떠오른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가 왜 자기 네 번째 발가락에 대한 시를 썼는지 이해가 된다.
언젠가는 매일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날이 나에게도 오겠지?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