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이름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소년이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낯설지만은 않은 장소의 천장이 자신을 반겨주었다. 분명 예전에 온 적이 있는 이장님의 집이었다.
소년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에서 전해져오는 통증 때문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다시 한번 약간의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자 잘 참았던 비명이 흘러나왔다.
“으악!”
하리의 옆에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고양이처럼 얌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명 때문인지 밖에 있던 이장님이 방문을 열고는 들어왔다.
“일어났구나, 하리야.”
이장님 온화하고, 몽롱한 목소리는 소년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장님, 이게 무슨.”
소년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소년의 마지막 기억은 눈보라 속에서 끊임없이 걷다가 누군가를 만나고는 쓰러진 기억이 끝이었다.
“무모한 짓을 했더구나. 송화가 아니었으면 분명 목숨이 위험했을 게다.”
이장님의 말에 따르면 송화가 근처 어른들에게 도움을 요청해 죽어가던 하리와 소녀를 이장님의 집으로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또한 소녀는 하룻밤이 지나자 잠에서 깨어났고, 건강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하리는 이틀 동안 일어나지 않았으며, 열도 높아서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 하리의 곁에서 송화는 이틀 밤낮으로 간호하며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지금은 지쳐 쓰러져 옆방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하리는 송화의 노고에 감사함을 느꼈다. 나중에 이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다고 다짐까지 하였지만 지금은 자신이 업고 온 소녀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안녕?”
하리는 활짝 웃으며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 하리의 인사에 소녀는 그저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름이 뭐야?”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하리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리는 그녀의 묵묵부답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간단한 고갯짓과 침묵뿐이었다. 하리는 혹여나 소녀가 말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혹시 말할 줄 알아?”
“응…….”
하리는 그녀가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녀가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이제는 그녀를 만난 날에 관해 물을 차례였다.
“혹시 산에 왜 쓰러져 있었어?”
“기억 안 나…….”
“혹시 기억나는 거 없어?”
“모르겠어.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하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하리는 그런 소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속상했다.
“지금 당장 애쓸 필요 없어. 내가 기억 찾는 거 도와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하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기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뭐라고? 잘 안 들려.”
소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소년은 뭐라 했는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물어보면 곤란해할까 봐 되물어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때 뒤에서 있던 이장님이 헛기침하고는 하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틀이나 쓰러져 있어 원장님이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니 오늘은 이만 보육원으로 돌아가고, 소녀는 내일 같이 보육원으로 갈 테니 원장님께 이 소식과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셨다. 하리는 알겠다는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기운차게 일어나고는 소녀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소녀도 대답하듯 손 인사를 건넸다. 하리는 소녀의 인사에 미소를 짓고는 이장님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집을 나가기 전에 자신을 위해 밤낮으로 간호해준 송화에게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가 있는 방 쪽으로 가 방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리는 오랜 침묵에 못 견디고는 문을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송화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리는 송화에게 고맙다는 자그마한 인사를 건네고는 집 밖으로 나와 자신의 집인 보육원으로 향했다. 보육원으로 향하는 소년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하리가 보육원에 도착하자 그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보육원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하리를 보자마자 달려들어 에워싸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하리를 향해 온갖 질문 세례를 쏟아붓기 시작했고, 하리는 그들의 질문에 답하느라 고생했지만, 그들의 온기와 웃음소리 덕에 지금 이 상황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소녀를 만나고 분명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체감상 몇 달은 지난 거 같아 더욱 아이들과의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이들과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원장님이 밖으로 나와 하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원장님이 점점 다가옴에 따라 하리의 머릿속은 원장님에게 혼나지는 않을까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걱정을 하는 동안 원장님은 앞에 도착했고, 소년의 걱정과는 다르게 원장님은 따뜻한 포옹과 말 한마디를 건네었다.
“고생 많았다, 하리야. 정말 장하구나.”
하리는 원장님의 품속에 파묻혀 원장님의 말을 듣자, 산에서 겪은 추위와 고통 속에서 오는 외로움이 떠올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원장님은 그런 하리를 말없이 껴안아 주며 토닥여 줄 뿐이었다.
몇 분이 흘러 눈물이 멈추자, 원장님은 하리에게 자신의 방으로 가 그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달라고 했다. 하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원장님의 방으로 가 그때 있었던 일과 송화를 만나 자신을 도와줬던 일까지 세세하게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면서 원장님은 하리의 말을 귀담아들어 줬고, 이야기가 끝나자 멋진 어른이 되었다는 말과 함께 오늘은 지쳤을 테니 방으로 올라가 쉬라고 했다. 하리는 원장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아이들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리는 방에 올라가자마자 대자로 뻗어 버렸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소녀를 만나 마을에 오기까지의 시간은 다시 상기할수록 분명 억겁(億劫)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하리는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온몸으로 느꼈으며 많은 것을 얻었다.
하리는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는 것을 마치고는 내일 올 소녀에게 보여줄 것들을 찾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방을 뒤져 찾아낸 것은 신기하게 생긴 돌과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둔 쌀과자, 그리고 선물로 받은 꽃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 꽃 사전이 다였다. 이런 것들을 다 준비해 놓고 나니 송화 생각이 들었다. 잠들어있는 자신을 밤낮으로 간호해준 송화에게도 자신이 아끼는 영롱하게 생긴 구슬을 선물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구슬은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돌과 쌀과자, 꽃 사전은 책상에 올려두어 내일 소녀가 오자마자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이부자리를 펴 잠자리에 들었다. 잠자리에 든 하리는 이틀간 잠만 잔 탓인지 잠이 쉽게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산에서 만난 소녀를 생각하며, 내일 무엇을 하고 놀지를 떠올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들고 말았다.
화창한 날씨에 보답하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와 밤의 암막을 걷어내는 쨍쨍한 햇빛이 소년의 잠을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하리는 기지개를 켠 후 이부자리를 정리하고는 세수와 입을 헹군 후 소녀가 오기 전까지 방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청소를 막 끝내 쉬려고 앉을 찰나 밖에서 아이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하리는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밖을 내다보니 거기에는 이장님과 소녀가 보였다. 소녀는 부끄러운 듯 이장님 뒤에 숨어있었다. 하리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계단을 통해 마당으로 내려갔다.
마당으로 나와 이장님과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녀도 하리를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둘만 느낄 수 있는 신호 같은 것을 주고받았다. 이장님은 원장님이 나오자, 형식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원장님이 소녀를 가리키며 하리에게 말했다.
“하리야, 이 아이에게 보육원을 소개해준 후에 빈방을 쓰게 하거라. 할 수 있지?”
“네!”
하리는 원장님의 말이 끝나자, 소녀의 손목을 잡고는 보육원의 1층부터 자신의 방이 있는 2층을 마지막으로 소개해 주고는 자신의 옆방에 소녀의 짐을 풀기 시작했다.
“여기가 앞으로 네가 지낼 방이야. 내 방은 나와서 바로 왼쪽이니까 필요한 거나 물어볼 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내 방으로 가자.”
하리는 이번엔 손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방으로 향해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소녀는 하리의 방이 신기한지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소녀가 둘러보던 와중 하리는 방석을 꺼내 그녀를 앉혔다. 소녀가 앉자, 하리는 어제 준비해 놓은 쌀과자를 그녀에게 건넸다. 소녀는 쌀과자를 건네받았지만, 이것이 뭔지 몰라 이리저리 둘러볼 뿐이었다.
“이건 쌀과자라는 건데 엄청 맛있어. 한 번 먹어봐.”
하리의 말에 소녀는 쌀과자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바삭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이 커졌다.
“맛있어?”
“응.”
소녀는 쌀과자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하리는 소녀가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거 다 먹어. 난 많이 먹어서 이제 질리거든. 다 먹으면 나중에 또 가져다줄게.”
라며 쌀과자가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를 소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소녀는 햇살 같은 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소녀의 웃음을 본 하리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들키지 않고자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게 했다.
“이건 내가 주운 돌인데, 신기하게 생겼지?”
그녀는 하리가 보여주는 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뒤편에 있는 꽃 그림이 그려져 있는 꽃 사전에 눈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리도 그런 소녀를 보고는 꽃 사전을 가지고 와 펼치고는 그 안을 보여주었다.
소녀는 뭔가에 홀린 듯 꽃 사전을 신중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장을 넘기던 손이 멈춘 것은 달맞이꽃이 그려져 있는 쪽에서였다.
“이 꽃이 마음에 들어?”
소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리는 달맞이꽃을 바라보는 소녀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지더니 마침내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네가 기억을 되찾기 전까지 부를 이름을 내가 지어줘도 될까?”
“이름?”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리는 그녀에게 이름의 필요성을 설명하더니 이름에는 모두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덧붙여 자신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산에서 발견되었으며, 하리라는 이름도 원장님이 지어주신 거라고 했다.
소녀는 하리를 한참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의 의미는 뭔데?”
하리는 소녀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하늘에서 내려주신 이라는 뜻이야. 너만 괜찮다면 너에게 이름을 선물해 주고 싶어.”
하리는 만약 소녀가 싫어하면 어떡하나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소녀는 걱정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좋아. 나에게 이름을 지어 줄래?”
하리는 소녀의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는 기뻐했다. 주먹 쥔 손에는 흥건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리는 신중하게 그녀의 이름을 생각했다. 그러다가 금송화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꽃의 이름은 어때?”
하리는 꽃에서 이름을 따오는 것을 제안했다. 소녀가 유심히 보던 달맞이꽃에서 따오면 딱 맞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좋다고 했고, 하리가 달맞이꽃으로 골똘히 생각하던 중 예전에 원장님이 얘기해주신 꽃말들이 떠 올랐다.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 그리고 소원이었다. 달을 맞이하기 위해 산 위에 올라 달을 기다리며 밤에만 꽃을 피운다는 이 꽃은 왠지 모르게 자꾸 마을의 전설과 겹쳐 보였다. 그런 의미와 사유의 끝에서 탄생한 것은 월영이라는 이름이었다.
“월영?”
“응, 월영. 달을 맞이한다는 뜻이야. 마음에 들어?”
하리는 소녀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싶었다.
“마음에 들어. 고마워, 하리야.”
소녀는 달맞이꽃이 달을 보며 활짝 만개하듯 하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월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