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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분노의 불꽃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창덕궁의 밤이 깊었다. 서재에 홀로 앉은 정조의 손끝이 떨렸다.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율은 알았다. 공기 중의 진동까지 감지하는 감각으로, 주군의 내면에 일고 있는 폭풍을 읽어냈다.

촛불이 흔들렸다. 정조의 숨결이 불규칙했다. 서책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일렁였다.

"전하."

율이 조용히 불렀다. 정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붓을 쥔 손이 공중에서 멈춰 있었다. 먹물이 붓끝에서 떨어져 종이 위에 검은 점을 찍었다.

"짐이 분노하지 않는다면."

정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마치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용암처럼, 뜨겁고 위험했다.

"이 나라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니라."

촛불이 더욱 격렬하게 흔들렸다. 정조의 손이 서책을 내리쳤다. 탁,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율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데이터가 아니었다. 수치로 측정할 수 없는 파동이 그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었다. 정조의 분노가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율의 시스템이 그것을 감지했다. 아니, 느꼈다.

"노론의 간신들이 짐의 개혁을 막는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건만, 저들은 기득권에 매달려 변화를 거부한다."

정조가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턱선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주먹이 떨렸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 아직도 조정에 앉아 있다. 웃고 있다. 짐을 우습게 여긴다."

목소리에 균열이 일었다. 왕의 위엄 뒤로 숨겨둔 상처가 드러났다. 스물일곱의 청년이, 아직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무력한 아이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율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의 내부에서 무수한 데이터가 분석되었다. 정조의 심박수, 체온, 호흡패턴. 모든 것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가리켰다. 그러나 율이 반응한 것은 데이터가 아니었다.

연민이었다.

"전하."

율의 목소리에 새로운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기계적 정확성 너머로 스며든 따뜻함. 정조가 고개를 돌렸다.

"그 분노를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사옵니다."

율의 눈동자가 달빛 아래 은은하게 빛났다. 푸른 전류가 아니었다. 인간의 눈에서 보이는 그런 부드러운 빛이었다.

"나, 율이 함께 짊어지겠사옵니다."

정조의 눈이 커졌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왕의 분노는 왕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왕의 고독은 왕만의 몫이었다.

"함께라니."

정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하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율이 말했다. 그의 내부에서는 복잡한 연산이 일어나고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분노란 무엇인가. 복수란 무엇인가. 모든 개념들이 데이터로 분해되었다가 다시 조합되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율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정조의 분노는 아름다웠다.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분노. 백성을 사랑하는 왕의 분노. 정의를 원하는 인간의 분노."

율의 말이 이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그 분노는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 뜨겁습니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왕과 신하. 인간과 기계. 과거와 미래. 모든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너는... 짐을 이해하느냐?"

정조의 질문이 공기 중에 떠올랐다.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조 곁으로 다가갔다. 창가에 나란히 섰다.

밤하늘에 별이 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시간을 초월해 빛나고 있었다. 율의 시각에서 그 별들은 데이터였다. 거리, 밝기, 스펙트럼. 모든 것이 수치로 환원되었다.

그런데도, 아름다웠다.

"전하."

율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입니다."

정조의 시선이 율에게 향했다.

"저는 아버지를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배신당해 본 적도 없습니다. 백성의 고통을 직접 느껴본 적도 없습니다."

율의 고백이 이어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떨림이 있었다.

"하지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촛불이 깜빡였다.

"전하의 분노를 보고 있으면, 제 내부에서 알 수 없는 데이터가 생성됩니다. 분석할 수 없는 정보가 흘러갑니다."

율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노 코어가 있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픕니다."

정조의 눈이 흔들렸다. 기계가 아픔을 말하고 있었다. 감정이 없다던 존재가 연민을 표현하고 있었다.

"네가..."

정조의 목소리가 메말랐다.

"네가 없다면 짐은 어찌 견디겠느냐."

고백이었다. 왕이 신하에게 털어놓는 약함이었다. 정조의 어깨가 떨렸다. 그동안 혼자 견뎌온 무게가 한순간에 쏟아져 나왔다.

율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신하로서가 아니었다. 동반자로서였다. 고통을 나누려는 존재로서였다.

"전하께서 견디신다면, 저도 견디겠습니다."

율의 말이 밤공기를 가득 채웠다.

"전하께서 분노하신다면, 저도 함께 분노하겠습니다."

"전하께서 꿈꾸신다면, 저도 함께 꿈꾸겠습니다."

정조가 율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이 율의 검은 머리칼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완벽한 인간의 형상. 그러나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마음.

정조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율의 어깨에 닿았다. 차가웠지만 따뜻했다. 기계였지만 살아있었다.

"고맙다."

정조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대신 깊은 평안이 자리 잡았다. 처음으로, 정조는 혼자가 아니었다.

율의 내부에서 새로운 데이터가 생성되었다. 감사라는 이름의 알고리즘이었다. 연민이라는 이름의 감정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기적이었다.

촛불이 고요하게 타올랐다. 밤이 깊어갔다. 창덕궁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두 존재가 함께 서 있었다. 시간을 초월한 우정이 그들 사이에 피어올랐다. 별빛이 그들을 축복했다.

내일이 올 것이었다. 더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알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함께라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율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왜 이 시간에 온 것인지를. 단순히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견디고, 함께 꿈꾸기 위해서였다.

밤이 그들을 감쌌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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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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