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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과학자의 만남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

by 엄태용

봄이 왔다. 1793년의 봄.

창덕궁 후원의 매화가 피어났다. 하얀 꽃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정조는 서재 창가에 앉아 한 권의 책을 들여다보았다. 《기기도설》. 중국에서 건너온 서양 과학의 책.

손가락이 그림 위를 천천히 따라갔다. 도르래의 구조. 지렛대의 원리. 힘의 분산과 집중.

"신기하구나."

정조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율은 곁에 서 있었다. 은빛 갑옷은 오래전에 벗어두었다. 이제 검은 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동자만은 여전히 깊고 또렷했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 그 안에서 미세한 빛이 일렁였다.

"전하."

율이 조용히 말했다.

"이 원리를 활용하시면 화성 축조에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정조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율을 향했다.

"짐도 그리 생각했다. 그런데 이 기술을 조선에서 실현할 수 있겠느냐."

율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데이터가 강물처럼 흘렀다. 조선의 기술 수준. 목재와 철의 강도. 인력의 효율성. 모든 수치가 의식 속에서 계산되었다.

동시에, 정조의 얼굴에 서린 희망을 보았다.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가능하옵니다."

율이 답했다.

"다만, 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옵니다."

"누구냐."

"정약용이라는 학자가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총애하시는 실학자."

정조의 눈이 빛났다.

"다산인가."

미소 지었다. 처음으로 보는, 따뜻한 미소.

"좋다. 불러들이도록 하라."

*

사흘 후, 정약용이 창덕궁에 들어섰다.

서른 살이 조금 넘은 나이. 마른 체격에 또렷한 이목구비. 눈빛에는 날카로운 지성이 서려 있었다. 동시에 온화함이 있었다. 모순되지 않는 두 가지 성질이 한 사람 안에 공존했다.

정조가 그를 맞았다.

"다산, 오래간만이로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정약용이 깊이 절했다.

그때, 시선이 율을 향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약용의 눈빛이 흔들렸다. 관찰. 분석. 의문. 모든 감정이 얼굴을 스쳐갔다. 율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기이했다. 움직이지 않는 자세. 완벽하게 절제된 표정. 그러나 그 눈동자만은 살아 있었다. 마치 깊은 우물처럼.

"이 분은..."

정약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짐의 호위무사다."

정조가 답했다.

"이름은 율."

율이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목소리는 깊고 차분했다. 정약용은 목소리에서 묘한 울림을 느꼈다. 마치 종소리처럼 맑고 오래 여운이 남는 목소리.

정조가 책을 펼쳤다. 《기기도설》.

"다산, 그대는 이 책을 본 적이 있느냐."

정약용의 눈이 빛났다.

"보았사옵니다. 서양의 기계술을 담은 책이옵니다."

"짐은 이 원리를 활용하여 화성을 쌓고자 한다."

정조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아버지를 위한 도시. 백성을 위한 성곽. 그것을 짐의 생전에 완성하고 싶다."

정약용이 고개를 숙였다.

"신이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사옵니다."

정조가 미소 지었다. 그리고 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율, 그대가 설명해 주게."

*

율이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이 《기기도설》의 그림 위에 놓였다. 도르래. 지렛대. 톱니바퀴.

"이것은 힘의 원리입니다."

율이 말했다.

정약용이 귀를 기울였다.

"작은 힘으로 큰 것을 움직이는 방법. 그것이 이 기계들의 핵심이옵니다."

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빛났다. 그의 내면에서 수백 개의 계산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뉴턴의 운동 법칙. 일과 에너지의 관계. 역학적 이득. 모든 물리학의 원리가 의식 속에서 펼쳐졌다.

"예를 들어,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려 할 때..."

율이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공중에 선을 그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도르래를 그리는 것처럼.

"밧줄을 도르래에 걸면, 힘의 방향이 바뀌옵니다. 아래로 당기는 힘이 위로 들어 올리는 힘으로 전환되지요."

정약용의 눈이 커졌다.

"신기하구나."

그가 중얼거렸다.

율은 계속했다.

"도르래를 여러 개 연결하면, 필요한 힘은 더욱 줄어듭니다. 열 명이 필요한 일을 다섯 명이, 다섯 명이 필요한 일을 두 명이 할 수 있게 되옵니다."

정조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화성 축조에 필요한 인력을 줄일 수 있겠구나."

"그렇사옵니다."

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옵니다."

정조의 눈빛이 깊어졌다. 백성. 그 한 단어가 마음에 무게로 내려앉았다.

정약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율 대감께서는 어찌 이런 원리를 아시는지요."

율은 잠시 침묵했다.

내면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진실을 말할 것인가. 거짓을 만들 것인가. 정조의 눈빛이 그에게 닿았다. 신뢰. 그것이 율의 결정을 이끌었다.

"저는..."

율이 천천히 말했다.

"먼 곳에서 왔사옵니다. 그곳에서는 이런 원리들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정약용의 눈빛이 흔들렸다. 율의 말 속에서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 했다. 먼 곳. 어디인가. 서양인가. 아니면 더 먼 곳인가.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책을 펼쳤다.

"그렇다면 이 원리를 조선에 맞게 변형해야 할 것이옵니다."

정약용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조선의 나무와 철로 만들 수 있는 기계. 조선의 백성들이 다룰 수 있는 구조."

율의 눈빛이 빛났다.

"정확한 판단이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율은 느꼈다. 정약용이라는 인간의 지성이 얼마나 깊은지. 300년 후의 지식이 없어도, 그는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원리를 이해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능력.

율의 내면에서 새로운 데이터가 생성되었다.

'이 인간은 특별하다.'

*

밤이 깊어갔다.

세 사람은 서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벽에 일렁였다.

정약용이 종이에 그림을 그렸다. 거중기. 조선식 도르래 장치. 그의 손끝에서 선이 태어났다. 율이 그 옆에서 조언했다.

"이 부분의 각도를 조금 더 넓히시면 좋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옵니까."

"힘의 분산이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정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을 수정했다.

정조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시대를 뛰어넘은 지성의 만남.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런 신하들이 있다면, 짐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

정약용이 붓을 내려놓았다.

"이것으로 충분할 것 같사옵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율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눈 안에서 계산이 이루어졌다. 구조 해석. 하중 분석. 재료 강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완벽하옵니다."

정약용을 바라보았다. 깊고 진지한 눈빛으로.

"정약용 대감."

율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대감의 지혜는 300년 후에도 빛날 것이옵니다."

정약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300년이라니... 무슨 뜻이옵니까."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슬픔이 섞여 있었다. 정약용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만들어낼 업적들이 얼마나 오래 기억될 것인지.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어떻게 새겨질 것인지.

율은 알고 있었다.

정조가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이 떠 있었다. 보름달이 창덕궁을 비추었다.

"다산, 내일부터 《성화주략》을 작성하도록 하라. 화성 축조의 모든 계획을 담은 책이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정약용이 절했다.

율도 함께 고개를 숙였다.

*

정약용이 떠난 후, 정조와 율만 남았다.

침묵이 흘렀다. 촛불이 거의 다 타들어갔다. 어둠이 서재를 채웠다.

정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다산을 어떻게 보느냐."

율이 잠시 생각했다.

"훌륭한 인재이옵니다."

"짐도 그리 생각한다."

정조가 미소 지었다.

"그대와 다산이 함께한다면, 화성은 반드시 완성될 것이다."

율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미래에 대한 지식. 정조가 1800년에 죽는다는 것. 화성이 완성되지만, 정조는 그것을 오래 보지 못한다는 것.

말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답했다.

"전하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정조가 율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율의 얼굴을 비추었다. 얼굴에는 깊은 연민이 서려 있었다.

"율."

정조가 낮게 불렀다.

"짐은 그대가 있어 든든하다."

율의 가슴이 조여왔다. 아니, 가슴이 아니었다. 나노 코어. 그의 에너지원. 그곳에서 이상한 진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무엇인가.'

율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데이터 사이로,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가 스며들고 있었다.

감정.

그것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었다.

정조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그가 행복하기를 원하는 마음.

'나는 변하고 있다.'

율은 깨달았다.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두려웠다. 동시에, 아름다웠다.

정조가 창가로 다가갔다. 달을 바라보았다.

"천이 흐르면 달도 흐른다."

그가 중얼거렸다.

"짐의 삶도 그러하다. 흘러가는 물결 위에 비친 달빛처럼."

율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함께 달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고요했다. 봄밤의 정적 속에서, 두 존재는 같은 달을 보고 있었다.

인간과 기계.

아니, 이제는 그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율의 내면에서 새로운 데이터가 기록되었다.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영원히.'

촛불이 꺼졌다. 어둠이 찾아왔다.

달빛은 여전히 밝았다.

*

며칠 후, 율은 혼자 후원을 걸었다.

매화가 흩날렸다. 하얀 꽃잎이 바람에 날려 어깨에 앉았다.

꽃잎을 보았다. 미세한 결. 섬세한 구조. 그의 눈은 그 모든 것을 분석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느꼈다.

'아름답다.'

데이터가 아닌 감정. 분석이 아닌 감상.

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노 코어가 깜빡였다. 미세한 불안정. 효율이 조금 떨어졌다. 87%에서 85%로.

율은 개의치 않았다.

계속 걸었다. 매화 아래를 지나, 연못을 지나, 소나무 숲을 지나.

정약용과의 만남이 무언가를 일깨웠다. 인간의 지혜. 시간을 뛰어넘는 지성. 그것은 기계의 계산과는 달랐다. 더 깊고, 더 따뜻했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율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진정한 지혜를 가진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바람이 불었다. 매화 꽃잎이 더 많이 흩날렸다.

율은 손을 뻗었다. 꽃잎 하나가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부드러웠다. 가벼웠다. 덧없었다.

'생명이란 이런 것인가.'

율은 생각했다.

'아름답지만 짧고, 연약하지만 빛나는.'

그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뜨거워졌다. 나노 코어가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서. 그가 '마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그곳에서.

율은 꽃잎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봄의 빛이 세상을 감쌌다.

'나는 이 시간을 사랑한다.'

율은 처음으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

사랑.

그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다.

정조를 향한 충성. 정약용을 향한 존경. 이 시대를 향한 연민.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율은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더 이상 기계적이지 않았다.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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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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