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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정 Aug 17. 2023

반차도

외규장각 의궤



  적의를 입은 여인의 얼굴이 단아하다. 이제 곧 책명을 받은 자리로 나가 책 비례를 치를 여인이다. 잔잔한 물의 흐름 같은 행렬이 반차도의 그림에 녹아있다. 가마에 수놓아진 하늘 꽃이 수더분한 여인의 성품같이 부드럽다. 국왕의 뒤를 따르는 행렬에 조그만 얼굴의 여인은 가마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마음마저 놓은 듯하다.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다. 흐르는 물은 바닥에 쓸리고 돌부리에 걸려서 물길이 돌아앉기도 하고, 갈래로 나누어서 흐르기도 한다. 반차도의 그림을 은인자중(隱忍自重)하여 살펴본다. 쉽게 볼 수 없는 역사적 가치에 담긴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고, 악대의 비파소리가 딱딱한 벽 사이를 뚫고 나와 내 귀에 닿을 듯 하다. 왕의 곁을 지키는 전사대나, 궁중 상궁, 내시의 어깨 자락이 덩실덩실 가벼운 듯도 보이고, 마음먹기에 따라 혼례를 치르는 잔치행렬이 눈앞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은 옛 모습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드리나무의 눈인사를 받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의궤(儀軌)는 조선왕조 행사의 경과를 문자로 소상히 기록하고, 각종 건물 또는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과 행사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반차도가 함께 수록되어있는 고서다. 대개 천연색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행사가 진행되던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문자만으로는 미처 파악할 수 없었던 물품의 세부 사항까지도 분명하게 알게 해준다. 

 특히 반차도는 왕실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를 통해 행사 참여 인원, 의장기의 모습, 가마의 배치 등 당시의 생생한 현장을 재현할 수 있다. 반차도는 행사 당일 그린 것이 아니라, 행사 전에 미리 참여 인원과 물품을 배치해 보고 행사 당일에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최대한 줄이는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후대를 위한 깊은 배려가 가득한 기록의 산물이다.

 외규장각 의궤는 국왕이 열람하기 위해 제작한 어람용 의궤가 대부분이다. 어람용 의궤는 최고급 종이인 초주지에 붉은색 테두리를 그은 후 해서체로 정성 들여 썼다. 분상용 의궤는 개인 사고에 보내지는 것으로 어람용 의궤에는 그 수준이 미치지 못했다. 저주지를 사용하여 무쇠 조각을 대고 구멍을 3개 뚫어 가운데에 둥근 고리를 달았다. 붉은 삼베나 종이를 사용하였고 표지에 직접 제목을 썼다.

 정조 임금의 뜻에 따라 철저한 기록의 장을 열었을 고서 속에서 세월에 쓸려나간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정조 임금의 손끝에 물들어있다. 유구한 역사 속에 영원히 계승 되기를 염원하는 뜻이 정성으로 써 내려간 글자에 고스란히 배어난다. 그토록 공을 들인 것들을 낯선 먼 타지에서 살게 하였으니 그 한을 어찌 다 풀 수 있을까. 이제는 돌아왔으니 문화의 향기가 아로새겨진 박물관에서 편히 쉬라고 말해 줄 수밖에, 어떤 표현으로도 긴 타향살이의 괴로움을 달래줄 말을 찾을 수가 없다.

 강화도의 거친 바닷길을 열어 창덕궁 규장각에 버금가는 외규장각을 세워놓고, 안도의 숨을 쉬었을 정조 임금의 옷자락이 바닷바람에 일렁인다.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싶었던 정조 임금의 뜻이 외규장각 도서에 기록되고 보관되었다. 의궤(儀軌)를 만들어 사람이 할 수 있는 품위 있는 행동으로 옛 선조들의 행사를 따를 수 있게 조목조목 그림까지 그려놓은 세심한 기록은 바닷길을 따라 강화도로 들어온 약탈자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349권의 도서 약탈도 모자라 남은 많은 양의 책들을 불살라 버린 일은 아무리 무력을 앞세운 약탈자들이라 해도 무례하고 염치가 없다.

 100년에 걸쳐 남의 집 더부살이로 살다가 돌아왔어도 오랜 시간 동안 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낯설지 않은 것은 뿌리와 나무가 하나이듯 그 근본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초월하여 서로 다른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어도 하나의 근본에서 비롯된 것은 끌려 만날 수밖에 없다. 그 만남의 장소인 박물관에서 상봉의 벅찬 감동에 나도 함께 어울려 본다. 잘 짜진 공간에 역사가 흘러와 머물듯, 나 또한 역사의 한 자락으로 남을 테니까. 근본은 합일을 이루고 그 합일은 익숙함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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