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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미정 Sep 16. 2023

물두멍

그리움의 에세이

    

 천성산자락에 물두멍이 있다. 돌을 깎아서 만든 물두멍이다. 등산객들에게 구슬 같은 하늘을 보여주기도 하고 허기진 사람에게는 풍성한 구름을 담아주는 물두멍이다. 물두멍 물을 한 줌 마셨다. 물에 떠 있는 구름이 달아날까 봐 마신 물이다. 뱃속을 구름으로 채워서 가뿐하게 산을 오를 참이었다. 물을 마시느라 물두멍을 툭 쳤다. 물두멍 속 하늘이 미간을 찌푸리며 파르르 떨었다. 

 물두멍에는 세상이 있다. 구름 냄새, 나무 냄새도 난다. 까만 눈으로 보고 있는 여자가 나를 닮았다. 땀에 젖은 얼굴에서 익숙한 냄새가 난다. 세상을 담은 물두멍 속 세상은 그저 신기하다.

 1년에 한 번 물탱크를 청소한다. 단수 때 쓸 물을 받느라 물통을 사는 집들이 많았다. 다급해진 나도 물동이를 사러 그릇 집으로 갔다. 다양한 크기의 물동이들이 세상 구경을 바라고 있었다. 너무 작은 것을 고르면 이틀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큰 것을 고르면 단수가 끝난 뒤 천덕꾸러기가 될 공산이 컸다. 

 그러다 문득 눈에 익은 물동이 하나를 발견했다. 알록달록 색깔이 고운 플라스틱 물동이가 아니라 시골 앞마당에 아무렇게나 나뒹굴 법한 고무 물동이였다. 반가움에 덜컥 고무 물동이를 샀다. 

 집으로 가져온 고무 물동이를 욕실에 두었다. 채울 수 있는 만큼 물을 틀어 깔랑깔랑 물을 담았다. 둥근 테두리에 물이 차서 넘칠 듯 말듯 부풀어 오를 때까지 가득 채웠다. 물동이 속에는 보름달 같이 생긴 환기팬 하나가 전부다. 텅 비어버린 물동이 속에 보름달마저 없었다면 허전할 뻔했다. 슬쩍 물동이를 흔들어보았다. 굴절되어 일그러지는 보름달 사이로 검게 그을린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가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보고 있다.


 시골집 장독대 앞에 빨간 고무대야 있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드무 라고 불렀다. 크고 작은 장독 반이 가려질 만큼 컸던 드무다. 드무 안에는 항상 물이 차 있었다. 수도꼭지에 긴 호수를 달아 물을 채우기도 하고 가뭄에 물이 마르면 물지게에 우물물을 길어와 드무의 테두리가 마를 틈을 주지 않고 물을 채웠다.

 나는 드무 옆에 서서 양철 물동이가 쏟아내는 물이 넓게 퍼지는 것을 구경했다. 하얀 물보라 사이로 팔랑이는 감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 같더니 그새 하늘이 털썩 주저앉아 주인 행세를 하려 들었다. 내가 밀어내 보려고 드무를 발로 쿵쿵 차고 나면 파르르 떨며 드무를 부여잡고 놓지 않던 하늘이다. 

 두 번째 물동이의 물을 드무에 채우려던 아버지의 얼굴이 물 위에 보름달로 떴을 때 아버지 냄새가 휙 하니 내 콧잔등을 싸고돌았다. 진하게 베인 땀 냄새가 드무의 물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른 아침부터 소를 몰고 묵정밭을 갈고 온 아버지다. 그냥 쉬어도 좋으련만 반쯤 비어있는 드무의 물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는 물지게를 어깨에 메고 대문을 나섰다.

 드무의 물은 아버지를 알아가는 거울 같은 거였다. 물동이의 물을 비워낼 때 비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다. 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었다. 나를 지게에 태우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런 분이었다. 갈색으로 빛나던 눈은 부드러웠고 높지 않은 콧등은 너그러워 보였다. 각진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편안한 얼굴, 그것이 드무에 비친 아버지였다.

 찬 기운이 소슬하던 가을날 아버지가 물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섰다. 나는 여느 때처럼 드무 옆에 서서 하늘을 흩어 놓느라 드무를 요리조리 흔들어대고 있었다. 잠시 후 우물물을 길어온 아버지가 물동이의 물을 쏟아내던 찰나, 나는 거울처럼 드무 속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드무 속에는 보름달 같이 생긴 아버지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그날 아버지의 얼굴은 어둠에 먹혀버린 조각달 같았다. 


 대대로 내려오던 선산을 팔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가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대 소쿠리를 채워주던 밤나무도,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던 감나무도 이젠 남의 것이 되었다. 물속에 비친 아버지의 얼굴에 묻은 그늘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드무 속 하늘에 밤나무와 감나무가 있던 선산이 그대로 와서 박혔다. ‘뚝뚝’ 하늘에 물꽃이 튀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비쳤던 상실감은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들어찼다.

 아파트 단수가 끝나도 고무 물동이를 욕실에 그대로 두었다. 환기팬일지라도 물동이 속에 뜬 보름달이 보고 싶었다. 요리조리 흔들어 모양을 일그러뜨려 보기도 하고 내 얼굴을 비춰보기도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 올려 보기도 했다. 


 천성산 물두멍 속을 빤히 보다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같이 갔던 일행이 보이지 않고 나만 혼자 서 있다. 물을 손수건에 적셔 이마에 대었다. 차가운 기운이 뼛속 깊이 스며든다. 물 냄새가 콧속에 머물다가 세상 속으로 숨어버렸다. 드무 속에 달로 떴다가 세상 밖으로 숨어버린 아버지를 닮았다.


 물두멍 속에 비친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의 모습이 편안한 모습이었으면 좋으련만 아픈 기억이라 물두멍 속 구름이 솜사탕 같지 않다. 삶은 고인 물처럼 평평하지 않아서 내가 흔들었을 때처럼 나풀나풀 흔들린다. 물이 조용해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지금은 고요한 물속에서 아버지의 삶도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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