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사람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다. 미국의 특성인지, 내가 사는 주 한정인지는 모르겠다. 아이 셋까지는 정말 흔하고 넷 이상도 꽤 보인다. 처음부터 아이를 여섯까지 계획하고 낳는 경우도 봤다. 주변에 공동 육아를 해줄 친인척이 많은 경우였다.
나와는 너무 다른 세상의 이야기다. 여러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으나, 한 명일 때보다 당연히 손이 더 많이 가고 힘들 거라고 짐작한다. 그런 양육자들에게 외동 육아쯤은 매우 손쉬운 일일 수도 있겠다. 다들 정말 대단하다. 나는 지금도 아이 하나 키우는 것이 벅차 허덕인다.
두 돌 이전에는 수면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새벽수유와 이앓이, 밤샘 울음 때문이었다. 세 돌이 지난 현재는 이도 다 났고 통잠도 곧잘 자는데, 아이에게 자기 주관이 생기면서 다른 방식으로 어려워졌다.
밥투정 없고, 책도 읽어주는 대로 잘 보고, 장난감도 주는 대로 갖고 놀았던 우리 아이는 만 3세에 가까워지자 독립심이 부쩍 강해졌다. 음식이나 장난감에 대한 호불호가 뚜렷해지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아기가 할 거야!”
“아니요, 아니요! 안 할 거야!”
흥분한 아이의 자기주장을 하루종일 듣고 있으면, 양육자의 체력이 3년 된 휴대전화 배터리처럼 쭉쭉 빠져나간다. 아이가 기상하는 아침 8시부터 시작해서, 아이가 낮잠을 자야 하는 오후 3시경이 되면 이미 나는 낙지가 되어 온몸과 정신이 흐물흐물하다.
만약에 갓난아기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그 떼를 어떻게 감당할까? 수시로 갓난아기에게 분유를 먹이고, 낮잠 재우고, 기저귀를 간다. 내 손에 아기 배설물이 묻은 와중에 큰아이가 사고 치고 투정 부리고 뒤집어진다. 그걸 수습하고 훈육할 정신이 있을까? 상상조차 하기 무섭다.
때때로 아이는 꼭 해야 할 일을 하기 싫다고 고집부릴 때가 있다. 손 씻기나 중요한 외출 등이다. 그럴 때 나는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네가 스스로 걸어서 갈래, 아니면 엄마가 번쩍 들고 옮겨줄까?”
독립심을 추구하는 나이라, 보통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스스로 간다. 이 시기의 아이들을 미국 엄마들은 쓰린에이저(Three-eenager) 라고 부른다. 만 3세(three)와 10대 청소년(teenager)의 합성어다. 실제로 우리 아이가 나에게 한 발언도 그와 궤를 같이 한다. 저녁밥을 안 먹겠다고 버티던 날이었다.
"엄마, 난 너무 많이 커서 밥을 안 먹어도 돼."
본인 말마따나 너무 많이 커버린 만 3세 청소년은, 의외로 가끔 엄마 손에 옮겨지고도 싶어 한다. 그때 내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는 그 힘은 진실로 우주의 기운을 끌어 모아야 나온다. 15kg에 달하는 아이를 들어 올려 옮기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 한계까지 끌어올린 우주의 기운이, 이미 갓난아기 돌보기에 쓰이는 중이라면 어떨까? 큰 아이를 돌보는 힘은 어디서 끌어오나? 아이가 두 선택지 중 하나라도 선택하면 상황이 빨리 끝나니 감사하다. 때때로 아이가 어떠한 선택도 거부한 채 발버둥 치고 울며 버티는 날도 있다. 그러면 진정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 줘야 한다.
몸시중드느라 한시도 눈 떼기 힘든 갓난아기를 두고 침착하게 기다릴 시간이 있을까? 나는 스트레스가 오면 신체반응이 빠른 편이라, 극도의 스트레스에 머리가 어지러워 휘청거릴 나 자신이 너무나 잘 보인다.
그래도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 이상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겠지. 아예 큰 아이를 일찍 기관에 보내거나 친인척의 도움을 받는 등, 한정된 에너지를 각각의 아이에게 나눠줄 방법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무슨 묘책을 쓴다 해도, 아이가 여럿인 부모들은 정신적,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 것임을 안다. 때문에 아이 셋이 기본인 우리 동네에서, 외동 엄마인 내가 육아에 대해 터놓고 얘기할 때 좀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아이가 하나뿐인데도 나는 육아가 정말 힘에 부친다. 그런데 그 힘듦을 실제로 표현하려고 하면 나는 왠지 모르게 머뭇거리게 된다. 사실 타지 육아를 주제로 글쓰기를 시작할 때 고민한 부분도 그것이다. "애를 하나밖에 안 키우면서 너무 힘들었다는 얘기만 줄줄이 쓰는 것 아닌가. 아이가 여럿인 독자들에게 과연 공감이 될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마치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내 육아의 고충을 터놓기가 좀 민망스러웠다.
하루는 몇 주째 고관절이 너무 시리고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다. 육아하느라 항상 너무 지쳐 있고, 매일 아기를 안고 다니느라 관절이 다 아프다고 했더니 물리치료과 의사가 나에게 아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하나라는 단출한 숫자를 듣자 “아…….” 하는 애매한 반응이 돌아왔다.
물론 남자 의사라서 가정보육의 고충에 열렬한 공감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다만 그날이 내가 아이를 하나만 키우며 힘들다고 했을 때 미적지근한 반응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들은 날이라 당황스러웠다.
조금씩 눈치가 보이고 자기 검열이 시작되었다. 애 하나 키우는 것 가지고 내가 너무 엄살을 부린 건가? 밖에서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나? 그 의사는 아주 친절하고 직업정신이 투철했지만, 그래서 몇 주 후에 내 고관절 통증도 많이 나아졌지만, 첫날 그 대화를 했을 때의 내 기분이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았다.
나는 놀이터에서 만나는 다른 엄마들에게도 가끔 농담 식으로 육아의 어려운 점을 얘기한 한 적이 있는데, 친절하게 반응해 주던 그 엄마들도 속으로는 “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또 모르지, 정말 진심으로 아이 키우는 것이 어렵다고 공감했을 지도! 남의 속은 알 수가 없다. 신혼인데 아직 아이가 없다던 그 물리치료과 의사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아…….” 했을 수도 있다. 그냥 내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는데, 괜히 내가 찔려서 그런 방향으로 해석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 내 처음 짐작대로, “애 하나 키우면서 그렇게 죽는소리를 한단 말이야?!”라는 뜻이었을까? 그걸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고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한가 하면, 그건 아니다. 내가 힘들다면 힘든 거다. 남의 집에 아이가 넷이 있든 다섯이 있든, 그 사람들이 죽을 듯이 힘들다고 해서 내가 덜 힘든 건 아니다.
육아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아기의 편의를 내 편의보다 앞에 두는 것이다. 내 몸이 피곤하고 아파도 일단 아기부터 먹이고, 입히고, 불편함을 해소해 주며 돌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본인의 기본 요구사항을 해결하는 것을 앞에 둔다. 그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가 육아나 간병이다.
내가 배고파도 남부터 먹이고, 내가 졸려 죽겠어도 내가 돌보는 대상의 편안한 잠자리부터 확보해야 한다. 보호 대상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돌보다가 정작 본인은 화장실 갈 시간을 놓쳐 방광염이나 만병 변비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나의 체력도 지키려고 아무리 효율적인 방법들을 선택해 봐도, 일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돌봄 대상이 최우선이 될 때가 많다.
직업 간병인은 퇴근이 가능하지만 육아는 퇴근이 없는 직업이다. 휴일 없이 24시간 일하는데 어떻게 아이 하나만 돌본다고 해서 안 힘들 수가 있을까.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고 신생아를 겨우 재우고서 시리얼에 우유를 붓고 한 숟갈 뜨려는데, 혹은 라면을 끓여놓고 한 젓가락 뜨려는데 아기가 깨서 악을 쓰고 운다. 달려가서 다시 재우고 돌아와 보니 푹 퍼진 시리얼 죽이나 라면 죽이 되어 있는 경우가 애 하나라고 없었겠는가. 아이가 하나라고 해서 라면이 30분이 지나도 쫄깃한 면발로 버텨주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돌봐주지 못해 서글픈 일들은 꼭 일어난다. 나도 돌봄 받고 싶다. 아이가 하나라도 힘든 건 그냥 힘든 거다. 이제는 남의 눈치 안 보고 나의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아이가 한 명뿐이어도 삶이 완전히 바뀐다. 아이 딱 하나만 낳고 길러도 일 년 넘게 정신과에 다니고 책 한 권이 나온다. 일기장이 난중일기가 되며 생존 기록이 된다. 나에게는 전쟁 같은 3년이었다. 지금도 전쟁은 진행 중이다. 그래도 그것이 나의 전쟁일뿐, 아이의 전쟁은 아님이 감사하다. 아이에게는 좀 심심하지만 안정된 일상이다. 나는 아기의 평화를 위해 매일 전장에 달려 나가는 장군이다.
사람이 너무 힘든 일을 겪으면, 뇌는 일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망각을 선택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하루도 잊고 싶지 않았다. 이 공사다망하고 지루한 나날들을 그대로 흘려보내면,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떠내려갈 것 같았다. 내가 세세히 기록하고 보관하지 않으면 이 모든 고뇌가 그냥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다. 집에서, 애를 보았다. 끝. 그런 건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아기가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고 있다. 처음에는 아이의 탄생이 소중하고 행복해서 그걸 기념하려고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오늘 하루도 살아 냈음을 확인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그날그날 있었던 작은 변화들을 다 적어서 남겨놓으며, 내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음을 증명한다. 그냥 두면 희미해질 날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이름을 짓는다.
아이 하나를 낳아 놓으면 그냥 저절로 크는 게 아님을 확인한다. 내가 아이를 돌보며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내적인 투쟁을 겪었는지, 그 성과는 무엇인지 기록해 둔다. 그리고 그 일기들을 모아 글을 쓴다. 그 글들이 모여 내가 된다.
삶에서 여러 종류의 어려움을 겪었으나, 육아만큼 나를 통째로 바꿔버린 고난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은 마음만 있고, 게을러서 아무것도 못 쓰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지금 밤잠을 줄여가며 매일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책을 내서 다른 타지 육아인들과 공감과 위로를 나누고 싶은 원대한 꿈을 꾸고 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 ‘애 하나 키우는 것’이 나에게만큼은 대단한 도전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