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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시 Sep 26. 2023

시크함이 오버사이즈였던 백일 한복

불완전함이 더 사랑스럽다

    뜨거웠던 여름이 저물고 어느덧 아기의 백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코로나 상황이 심각하여, 우리는 손님을 초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대신 우리끼리 집에서 백일상을 차리고 한복 사진을 찍어 기념하기로 했다. 나는 한복 사진에 약간의 집착이 있기에, 세 가족이 한복을 입을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나는 한복을 참 좋아한다. 매일 입을 수 없는 특별한 분위기의 옷이라서 입으면 기분이 좋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서 좋다. 사진을 찍으면 화려한 색감이 선명하게 나와 더더욱 좋다. 웨딩 촬영도 한복 경험이 많은 스튜디오를 찾아가서 할 정도로 한복 사진에 공을 들였다.


    결혼식 후 바로 미국에 건너와 살게 되었지만, 한국 땅에서 멀리 있기에 한복에 대한 나의 애착은 도리어 깊어졌다. 한국에서 예쁜 생활한복들을 해외배송받아, 나들이 다닐 때 종종 입고 다녔다. 미국 소도시인 우리 동네 영화관에서 BTS (방탄소년단) 콘서트 실황 영상이나 다큐멘터리를 상영할 때면, 자랑스럽게 생활한복을 입고 가서 응원하기도 했다.


    한복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내가, 아기 한복 사진 찍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기 백일 한복은 임신 때부터 한국에서 배송받아 놨다. 아마존이나 엣시(Etsy) 등의 미국 온라인몰에서 파는 한복보다, 한국에 있는 한복집 물건들의 색감과 디자인이 더 세련되어 보였다.


    실물로 본 아기 한복은 귀여웠다. 전체적으로 남색에, 양팔 소매는 채도가 낮은 색동이었고, 바지는 밝은 회색이었다. 옷감 재질이나 마감 또한 깔끔했다. 그러나 막상 백일 당일날 사진을 찍고 나니, 결과물이 좀 아쉬웠다.

  



    한복 주문 당시에 “이왕 사는 거 돌쟁이 치수로 사라”는 말을 인터넷에서 본 것이 화근이었다. 가격도 비싼 한복을 백일날 딱 한번 입히고 버리기 아까우니까, 좀 큰걸 사서 돌 무렵까지 오래 입히라는 취지였다.


    얼핏 알뜰살뜰하게 들리는 조언에 솔깃해진 나는, 그 조언을 따라 돌 치수 한복을 주문했다. 결과는 쓰디썼다. 촬영 당일날, 양팔 소매를 끌어올려도 자꾸 흘러내려 아기 손을 가렸다. 전체적인 옷 태가 벙벙했다. 당시에 유행했던 오버사이즈 트렌드를 따랐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시크한 가을 아기 스타일이라고 정신승리를 시도해 봤지만, 왜 눈물이 앞을 가릴까?


    사실, 아기가 인형처럼 자그마한 시절은 의외로 몇 개월 안 된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켜져 묵직해진다. 백일사진은 아이가 가장 조그맣던 시절에 남기는 특별한 한복 사진이다. 비록 한 번 입고 말더라도, 그 작은 몸에 딱 맞는 한복을 고르는 게 맞았다. 타지에 사는 초보 엄마였던 나는 그걸 잘 몰랐다.




    또 한 가지 아쉬웠던 부분은 한복의 색상이다. 남색인데 너무 어두운 색으로 샀다. 한복 자체는 예뻤으나 내가 간과한 것은 사진 기술적인 부분이었다. 한복집 웹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들은 색 보정이 되어 있으니 당연히 세부 디자인이 모두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을 생각 못했다.


    미국 집들은 간접조명이 많아서 대체로 어두침침하다. 당시 우리 집도 그랬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진 찍는 기술도 없고, 포토샵 같은 건 써본 적도 없는 일반인이다. 그런 내가 미국 집에서 촬영용 조명이나 반사판도 없이 사진을 찍으니, 남색도 아니고 그냥 검은색 옷 입은 아기처럼 뭉뚱그려져서 나왔다. 


    환한 색의 옷을 입혔으면 더 잘 나왔을 텐데. 아쉽다. 임신 시절에 쇼핑할 때는 남색 한복을 입은 시크한 아기 사진이 맘에 들어 그걸 골랐지만, 내가 낳은 아기는 밝은 색이 훨씬 잘 받는 아기였다. 아기 실물을 보기 전에 한복을 고르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하고 깨달았다.


    요즘 웹소설계에 유행하는 회귀물의 주인공처럼, 아기 한복을 주문하던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어떨까? 육아 경험이 완전하게 갖춰진 나로서 돌아간다면, 나는 무조건 해님처럼 반짝반짝 존재감을 뽐내는 노란색 아기 한복을 고를 것이다. 백일 사이즈가 맞는지 거듭 확인한 후에 주문하고, 곧장 현재로 원상복귀 완료한다. (신생아 육아, 수면교육, 이유식 등을 절대 반복할 수 없다) 현재에서 노랑 병아리같이 나온 백일 사진을 뿌듯하게 감상하며 마무리! 회귀 소원치고는 심하게 소박하지만, 멋진 결말이다.


    시간 여행까지 넘나드는 엄마의 복잡한 상념과는 별개로, 백일 사진 속 우리 아기는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고 완벽하다. 귀여운 아기 복숭아다.

 



    나는 아기 백일사진과 돌사진뿐만 아니라, 출산 전 만삭사진도 이곳 미국에서 남편과 함께 셀프로 찍었다. 당시엔 삼각대도 없어서 각도도 다 기울어져 있고. 구도도 어정쩡하고. 머리모양과 옷매무새도 조금씩 흐트러져 있다. 신기한 것은, 전문 스튜디오에서 흠 하나 없이 완벽하게 찍은 결혼사진들보다 이 엉성한 만삭사진들을 더 많이 찾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나름대로 컨셉 잡고 찍은 만삭사진을 보면, 일단 "푸흐흡!" 하고 웃음부터 난다. 남편과 할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남편은 테니스를 좋아하고 나는 책을 좋아하니까 테니스장 벤치에서 뱃속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는 장면을 연출하여 사진을 찍었던 일, 트렁크에 둔 카메라가 자꾸 기울어져서 수십 번씩 다시 포즈를 잡았던 이야기, 남편 직장 앞 연못 부근에서 "여기 멋지다!" 하며 촬영했는데, 찍고 보니 주차장 표시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던 이야기 등....... 어설프고 웃긴 촬영이었다. 그래서 결과물이 더 생동감 있어 보이고 정감이 간다.


    실수담이 소중한 추억이 되고, 완벽하지 못했던 부분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내가 직접 준비해서 찍은 아기 백일사진 또한 그렇다. 지금 이 글에서 백일 한복이 아쉬웠다고 줄줄이 써 내려가고 있지만, 사실 나는 백일 사진 몇 장에 풀어낼 수 있는 추억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즐겁다. 이런 걸 해낸 스스로가 너무 자랑스럽고 멋지기도 하다.


    나는 계속 한국에 살았으면 셀프 촬영 같은 건 평생 못 해봤을 성격이다. 뭐든 다 전문가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런 내가 미국에서 임신하고 육아하느라 셀프 촬영도 몇 번이나 해 보고, 생각지도 못한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불완전함이 선물하는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그중 하나다. 벌써 수많은 실수담과 이야깃거리를 얻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그 이야기를 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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