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우울증 증상이 있구나 하고 느낀 건, 출산 6개월 경부터였다. 그 시기에 쓴 일기를 보면 어떻게 증상이 발전해 나갔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온 벽과 바닥에 발린 음식을 닦으며 느꼈던 절망이, 사실은 이유식 하나 때문만이 아님을 서서히 깨달았다.
어느새 나는 뭘 해도 무표정했다. 무감동해져 갔다. 아무런 의욕이 없었다. 출산 후 한 달 경만해도, 아기 등 뒤에 있는 TV로 줌바 동영상을 틀어놓고 보며 신나게 춤을 따라 추었다. 바운서에 앉은 아기가 나를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활짝 웃으며 동작을 더 크게 했다.
나는 춤추는 것을 좋아한다. 줌바, 힙합 댄스 등, 따라 추기 쉬운 동작이 나오는 동영상을 TV에 띄워놓고 남편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나의 소소한 취미다.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아드레날린이 샘솟고 호흡이 가빠지며 신이 나곤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줌바 동영상 앞에서 나는 멍하니 기계적으로 동작만 따라 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게 귀찮았고, 빨리 노래가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동작을 정확하게 잘하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재미가 없었다. 이걸 왜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중엔 남편이 권해도 잘 안 했다. 하기 싫었다.
특별하고 즐거워야 할 생일도, 기념일도 시큰둥했다. 그냥 평소에 하던 육아를 하다가, 케이크와 저녁식사를 밖에서 사 와서 먹는 날이다. 오히려 신경 쓸 게 더해져서 성가셨다. 새해 카운트다운을 이렇게 아무 기쁨 없이 보낸 것도 성인이 되어 처음이었다. 밝아오는 새해에 희망을 품을 여유가 없었다. 너무 피곤했다. 오밤중에 동네 불꽃놀이 소리에 깨서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바빴고, 굳이 새벽까지 불꽃을 터뜨리는 그들이 너무 미웠다.
음식을 먹어도 감흥이 없었다. 그냥 입 안에서 질척한 물질이 씹힐 뿐이었다. 입 안에서 쓴 맛이 날 때도 있었다. 임신 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면서 또 달랐다. 임신 때는 식욕이 있었지만 맛을 못 느껴서 답답했던 거고, 이 때는 음식 맛이 느껴지는데도 참 따분했다.
어릴 때 특히 좋아했던 피자, 햄버거, 스파게티류가 제일 맛이 없었다. 이건 내가 현재 미국에 살아서 그런 것도 있다. 미국 피자는 정말 단순한 짠맛이 난다. 그냥 짠 게 아니라 매우 짜다. 달고 복잡한 맛이 나는 한국 피자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이민 초기엔 좀 당황했지만, 결국엔 적응해서 나중엔 꽤 잘 먹게 되었다.
그러나 우울증이 심했던 그때는 진짜 두꺼운 골판지를 소금물에 푹 절여 케첩을 두껍게 발라 먹는 기분이었다. 햄버거는 퍽퍽했고 스파게티는 건조했다. 한국 스파게티는 소스를 듬뿍 넣는 편이다. 자박한 국물에 김치국수를 말아먹듯 스파게티 면을 소스에 푹 담가버린다. 나는 아마 그게 그리웠나 보다. 지금 쓰면서 생각해 보니 이게 우울증보다는 향수병이었을 수도 있다. 안 그래도 힘든 육아 일상인데, 내 입맛에 딱 맞춰진 음식과 너무 멀리 산다는 사실이 더 우울감을 부추겼다.
외모 변화도 우울감에 한몫했다. 호르몬으로 인해 임신 기간 내내 잘 빠지지 않았던 머리카락이 아기 백일 전후로 한꺼번에 우수수 빠지기 시작했다. 임신 전에 책에서 읽어서, 출산 후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알고는 있었다. 막상 내 현실로 닥치니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앞이마와 정수리에 잡초처럼 줄지어 뾰족뾰족 난 머리카락들이 참 못났다. 어떻게 해도 가라앉지 않고 꼿꼿이 솟아 자기주장을 한다. 어설픈 중닭의 듬성한 깃털 같기도 하다. 임신 시절 온갖 신체의 변화에도 “나 이 정도면 꽤 괜찮은데?”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던 내가, 잔디머리에서 장렬히 무릎을 꿇었다. 사진도 찍기 싫었고, 거울을 볼 때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가라앉히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스트레스만 더할 뿐이었다. 이 초라한 존재가 나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겉모습의 변화뿐 아니라 건강의 악화도 있었다. 미국에서의 블랙 프라이데이 즈음이라, 하이체어 등의 아기용품을 세일가에 사려고 한동안 인터넷 쇼핑에 무척 집중하던 때가 있었다. 며칠간의 쇼핑을 다 마치고 나니, 머리에 맥박이 뛰는 게 느껴질 정도로 눈이 욱신욱신하고 아팠다. 눈앞이 침침하고, 이물감도 느껴졌다. 진통제를 먹어도 그때뿐인 통증이 몇 주를 갔다.
겨우 욱신거림이 잦아들고 모처럼 밖에 나가 산책을 했을 때, 나는 내 눈에 굉장한 양의 부유물이 생겼음을 깨닫고 놀랐다. 햇빛을 보면 그 부유물들이 시야 가득 떠다니는 게 느껴졌다. 밖에 나가기도 싫었다. 하늘을 봐도, 멀리 있는 풍경을 보아도 내 눈 속의 부유물만 커다랗게 보였다.
이제 예전 같은 선명하고 깨끗한 시야는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건가? 나는 내가 깨끗한 시야를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잃어버린 후에야 알았다. 이게 그 쇼핑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그전부터 그랬는데 내가 집에만 있어서 잘 몰랐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스트레스 때문일 테다. 적어도 출산 이후에 일어난 일임은 확신한다.
귀에서 '삐-' 소리가 지속되는 이명도 생겼다. 그건 분명히 신생아 육아 기간에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 암담하다. 완치가 되긴 할까?
내 눈도, 귀도, 수술 자국이 난 배도,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출산은 인간의 몸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남긴다.
굳이 눈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당시에 밖에 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본래 내향적인 성격이라 집을 좋아하긴 했으나, 그때는 내 선택이 아니라 공포 때문에 못 나갔다. 코로나 상황이라 바이러스 전염이 무서웠다. 미국 뉴스에서는 연일 아시아 혐오 범죄가 보도되었다. 바이러스는 마스크를 쓰면 되지만, 사람이 공격하면 어떻게 방어하나. 내가 어린 아기를 무사히 지키며 도망갈 수 있을까. 사람이 무서웠다.
자동차를 운전하기도 겁이 났다. 출산 한 달 전까지 매일 타고 출근했던 내 차인데, 운전대를 잡은 손의 느낌도, 브레이크를 밟은 오른발의 느낌도 낯설고 이상했다. 꼭 내가 뭘 잘못 판단해서 큰 사고를 낼 것 같았다.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차를 운전해 치과 정기검진 등을 갈 때는 목숨을 걸고 가는 기분이었다.
아기 생후 8개월 차, 아침에 일어나서 1층에 내려왔는데 갑자기 울음이 울컥 밀려와 식탁을 붙들고 통곡을 했다. 몸속에 자동 울음 기능이 켜진 것처럼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남편이 출근을 미루고 2층에 있는 아기를 돌봐 주었다. 겨우 울음이 그쳤을 때, 남편이 “내가 뭘 도와주면 좀 나을까요?” 하고 물었다. 나는 “그동안 힘들었던 게 터진 것 같아요. 오늘 울면서 풀어냈으니 후련하기도 하니까, 이젠 괜찮아질 거예요.” 하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현상은 일회성이 아니었다. 내 생일, 기념일, 공휴일이 연달아 있어 사흘간 집에 있던 남편이 다시 회사로 출근하기 전날, 또 뚜렷한 이유 없이 눈물이 터져 한밤중에 심하게 울었다. 꺽꺽하고 주체할 수 없는 곡소리가 났다.
남편은 내가 우는 이유와 해결 방법을 알고 싶어 했고,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질문은 도리어 내가 하고 싶었다. 그냥 울음이 나왔는데, 정확한 이유는 몰랐고, 어떻게 해결할지는 더더욱 몰랐다. 우리 둘 다 어쩔 줄 몰라했다.
다음날, 전날 울음의 여파로 눈이 퉁퉁 붓고 우울감이 지속되었다.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었고 말할 기운도 없었다. 아기가 누워서 옹알이를 하며 노는 동안, 나도 그 옆에 누워 있었다. 평소처럼 노래하거나 책을 읽어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말할 기운이 없어서, 그냥 옆에 조용히 있을게” 하고 아기에게 양해를 구했던 것이 기억난다. 귀여운 아기는 불평 없이 잘 먹고 놀았다. 너무 고마웠다.
이렇듯 우울과 불안 증상이 지속되던 출산 12개월 차. 시가를 방문하러 외출하기 직전이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고, 빙글빙글 어지럽고, 불안해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남편의 엄마를 사랑하고, 시가에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갑자기 내 몸이 왜 이러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자기 혼자 아기를 데리고 갔다 올 수 있다고 했지만, 이 상태로 나 혼자 집에 있으면 더 힘들 것 같았다. 고요한 음악을 찾아 들으며 진정한 뒤 시가에 갔고, 다행히 괜찮아졌다. 공황 발작이 온 그날로부터 2주 후에 정신과를 첫 방문했다.
이렇게 내가 겪었던 증상들을 스스로 정리해 보니, 그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지금은 보인다. 당시에는 그저 “이번엔 또 왜 이러지?” 하고 당황하기만 했지만, 이제는 잘 안다. 내가 딱히 뭘 해서, 혹은 안 해서 우울증이 생겼다기보다는, 타지 육아 자체가 우울증이 기생하기에 최고의 환경이었다.
타지생활을 하는 나 자신을, 마치 뿌리를 옮겨 심은 식물처럼 수시로 살피고 더 많이 신경 써줘야 한다. 햇볕과 물, 충분한 양분을 적극적으로 공급해줘야 한다. 줄기와 이파리가 시들시들해지고 바싹 말라가던 나는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썼고, 내가 찾아낸 방법은 정신과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내게는 그 방법이 효과가 있었다. 내가 정신과에 처음 방문한 날에 썼던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어서 옮겨 써 본다.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제발 회복되었으면. 마음의 응어리가 풀렸으면.”
간절히 바랐던 그 말대로 나는 조금씩 회복되었다.
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나는 오히려 남편에게 짜증을 많이 냈다. 곧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그래도 속으로 꾹꾹 담아두기만 하던 신생아 시기와는 다른 모습이 계속 나왔다. 아마 그때 표현을 제대로 못했던 것이 쌓여 탈이 났나 보다.
치료 과정 중에는,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일단 남편에게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상처 주는 방법이었다면 그 후에 사과했다. 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소통하는 게 더 나을지 의논하고, 비슷한 상황이 또 왔을 때 다른 표현 방법을 쓰려고 노력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짜증이 확 올라오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는 별도리 없이 남편이 그 뾰족한 말들을 받아내야 했다. 나는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얼른 2층으로 올라가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남편과 아기와 산책도 더 자주 하고, 내키지 않아도 남편과 줌바 동영상을 보며 열심히 춤을 추었다. 그럴 의욕도 한 줌 없는 날에는 꼭 필요한 말만 하며 조용한 하루를 보냈다. 그 험난한 시간을 버티고 나를 지지해 준 남편에게 온마음으로 감사한다.
누구나 정신과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 건 아니다. 내가 겪었던 치료 과정이 좋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치료약 부작용으로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약에 적응하자 이번엔 파동 그래프처럼 우울감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를 반복했다. 치료가 효과가 있는 건지, 헛고생만 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서 큰 그림을 보면, 방향은 아주 서서히 좋은 쪽으로 가고 있었다.
약물치료와 상담을 받으며, 나의 불안과 공포는 비교적 빨리 가라앉았다. 우울감과 무기력 증상이 가장 오래갔다. 치료약은 1년 3개월 정도 복용 후 서서히 끊었다.
단약 직후 무기력 증상이 다시 돌아오는 듯해서 겁이 덜컥 났다. '이렇게 도로아미타불이 된다고?' 다시 병원에 가서 약을 타 와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내가 타지 육아 글쓰기를 시작하고 집중할 거리가 생기자 증상이 많이 개선되었다.
독서와 글쓰기는 언제나 나의 기쁨이었지만, 글쓰기가 내 정신건강 지킴이까지 되어줄 줄은 몰랐다. 나를 살게 해 주는 소중한 글쓰기. 내 삶의 의욕을 끌어올리는 마중물 같은 존재다.
부끄럽지만 내 작은 글이, 내 비루한 경험담이, 비슷한 상황에 있는 우울한 육아인들에게 작은 도움과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진심으로 그렇게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