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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Jan 02. 2024

존 레논,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이재명

오전에 인터넷으로 생필품 장을 보던 찰나, 네이버 메인 뉴스에 뜬 갑작스런 습격 기사를 보고 놀랐다.

여태까지 정치인들이 테러를 당하는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소주병 투척 및 커터칼 자상,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계란 투척, 이재명 대표의 쇠그릇 위협 등이 있는데, 지금의 사건은 거의 살인미수 수준에 달하는 중대한 공격이다.


나는 어떤 범죄 사건이든, 그 것이 옳다 그르다로 접근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에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라도 폭력은 안 된다?

그 안 되는 일이 왜 현실 속에 벌어 졌는가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틀렸다, 잘못됐다."는 해답이 아니다.

그런 단순한 접근 방식이라면, 당연히 잘못됐으니 처벌해야만 할 일이고, 그래서 법에 의거해서 처벌할 뿐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언제나처럼 계속 벌어 지고 있다.

절대 재발 방지는 되지 않는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던 비틀즈의 전 멤버, 존 레논은 마크 채프먼이란 자에게 총격으로 사망했고, 본래 팬이었다고 하나, 그가 종교를 모욕하는 오만한 발언을 일삼으면서 신성모독을 저지르고, 무소유를 주장하더니, 오히려 막대한 부를 누리는 위선자라기에 그를 처단했다고 한다.


일제의 총독,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도, 뭐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하여튼 한민족의 원수이기에 그를 쏘았다고 했다.


지금 이재명 대표를 공격한 그 사람이 현재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으나, 나는 위에 열거한 인물들과 마찬가지처럼 나름의 당위성이 있기에 그러한 일을 저질렀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재명 대표의 피습 사건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는데, 처음에 존 레논이 떠 올랐고, 그 다음에 이토 히로부미도 떠 올랐다.


대한민국에는 이재명 대표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고, 정치적 이념에 반대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적 반감이나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인간적으로 이재명 대표를 좋게 보지 않는다.

이재명 대표를 싫어 하는 수십, 수백이 될 지도 모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정도에 따라 그리 크게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층이 존재할 터이고, 그보다는 싫어 하는 층이 있을 테고, 아주 극렬히 싫어 하는 층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여태까지 이재명 대표가 걸어 온 행보 중에,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하지만,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데, 부정적인 악영향이 점점 쌓이고 쌓이다가, 극렬히 싫어 하는 소수 층에서 이재명 대표를 직접적으로 해칠 생각까지 품는 자가 한 명 발생하는 극점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재명 대표를 표적으로 삼았고, 나 하나 희생하더라도 이재명 대표를 반드시 처단해야겠다는 어떤 의무감의 발로이지 않은가, 나는 그리 생각한다.


지금의 시대는 분노, 원망, 미움, 갈등으로 가득히 팽배해 있는 시대이다.

정치 진영적, 세대적, 계층적, 다변화로 급성장한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엄청난 성장통의 후유증을 겪고 있는 것.

일당독재, 주석 체제로 사상과 언론을 통제하는 중국과 북한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나의 사상과 사회체제만이 진리이고, 나머지는 다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계층, 문화, 진영 논리로 내분을 하는 현상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싫어도 굽히면서 안으로 삭히면서 살든지, 정 싫으면 권력의 총구를 향해 달려 들다가 생을 끝내야 한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이런 데서 맹점이 있다.


다양성을 존중하라, 남이 나와 다른 것을 '존중'하라?

내가 빨간색이 좋아 빨간색 옷을 입었는데, 타인은 파란색 옷을 입는다.

사람마다 기호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을 이해하면, 나는 나 좋은 옷을 입으면 되지, 타인이 파란색 옷을 입든, 검은색 옷을 입든, 뭔 상관인가.

그런데, 정치적으로 좌, 우파가 대립하고, 다양한 지역적, 세대적, 계층적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타인이 파란색 옷을 입는 것을 다양성이라는 시각을 보지 않고, 옳고 그름의 시비분별로써 접근하기 때문에, '다르다'가 아니라, '틀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건 아니지. 그 건 잘못된 거지."


이 건 존중이 안 된다.

다른 게 아니라, 잘못되고 틀린 사람을 어떻게 '존중'할 수 있단 말인가.


"틀린 게 어딨어? 그렇게 비뚤어 지게 보는 네가 잘못됐지."


이래서 싸운다.

이러한 다양한 정치적, 계층적 대립과 갈등이 극으로 고조에 달했기 때문에 여기에 불만을 품고, 내면에 분노가 가득한 사람들이 점점 양생이 되어 간다.

그 중에는 내가 이 분노와 불만을 풀고 살 수 밖에 없을 바에, 차라리 죽거나 감방에 사는 게 나을 정도란 결심이 도달할 때까지 내면에 부정적 감정이 가득 쌓이게 된다.

결국, 그 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 오늘날 다양한 흉기 범죄, 테러 사건 등이다.

사형도 소용없고, 무기징역도 소용없다.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풀지 않고선 살아 갈 이유가 없는데, 사형 따위가 뭐가 두렵겠나.

그 부정적 감정이 극도로 달하는 스트레스는, 당사자는 생을 포기해도 아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일 것이다.

사람이 아프면, 빨리 낫고자 하는데, 이렇게 정신적으로 괴로운 것은 오히려 모 아니면 도 식으로 극단성에 치닫는다.


지금 이재명 대표의 사건을 보면서, 이 걸 둘러 싸고 또 싸우는 사람들.

인터넷 상의 기사 댓글이나, 커뮤니티, SNS 등에는 해당 가해 남성을 비롯해, 이에 대해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는 것에 대해 또 부정적인 표현이나 감정적 표현을 쓰는 사람들.

내가 보기엔 이 대표를 찌른 그 사람이나, 인터넷에 온갖 험한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나, 완전히 똑같은 사람들일 뿐이다.

다만, 그 남성은 행동으로 표출했을 뿐이고, 댓글을 쓴 사람들은 언어적으로 공격하면서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배설했을 뿐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둘은 결국 같다.

그런데, 왜 인터넷 공간에서 인격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정의롭고 상식적인 일반인이고, 행동으로 표출한 사람만 범죄자라는 족쇄를 씌워서 감방에 살아야 하는 지.

우리의 집단적이고 공통적인 공격성이, 결국 이렇게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을 계속 양성하고 있는 공범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넓은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우리를 공격하면서 자멸해 가는, 애초에 범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시대나 환경에 따라 서로 역할을 달리 해 가면서 누구는 가해자가 되고, 누구는 피해자가 될 뿐.

우리가 동물들이 먹이사슬로 살아 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동물들의 세계라고 느끼는 것처럼.

개구리가 파리를 먹고, 그 개구리를 뱀이 먹고, 그 뱀을 먹는 또 어떤 동물이 있겠지.

누구도 그 행위를 범죄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다 먹고 먹히는 게 먹이사슬인데, 뭐.

헌데, 지금 우리 사회는 개구리가 파리를 잡아 먹은 건 생각 안 하고,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었다고 '가해자'라고 한다.

웃기게 돌아 가는 세상이다.


저마다 각자가 가진 당위성과 어떤 정의감, 윤리의식 따위로 "너는 틀렸다, 그래서 너는 나쁜 사람이다."라며 공격을 하는 것처럼, 그 사람도 어떤 마땅한 당위성이 있기 때문에 이 대표를 해쳤다.

헌데, 그 사람이 죄가 된다면, 칼만 안 들어도 칼보다 더 무서운 말로 인격살인을 하면서 행동 대장을 양산하며 살아 가는 사람들은 왜 죄가 안 되고, 행동에 옮긴 사람은 겉으로 눈에 보이니까 그 사람은 악인이다, 범죄자다 하면서 처벌하는 것은, 너무 우리가 우리 사회의 큰 그림을 놓치는 것이 아닐까?


존 레논도 그런 당위성에 따라 반전 활동이나, 이런저런 활동을 했고, 마크 채프먼은 그런 존 레논이 위선자, 신성모독자라는 이유로 방아쇠를 당겼다.

글쎄,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우리 선조를 힘들게 하는 역할이 그에게 주어 진 임무였기 때문에, 그런 당위성 때문에 했고, 그런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원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방아쇠를 당겼다.

헌데, 왜 마크 채프먼은 범죄자로 감방에서 죄인으로 살아야 하고, 안중근 의사도 비록 처형을 당했지만, '의사'라는 호칭을 붙여 주는가.

당한 사람도 당위성이 있어 그렇게 살았고, 해친 사람도 당위성이 있어 해쳤다.


지금의 이재명 대표 피습 사건을 누가 잘 했다, 못 했다의 관점으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 지는 넌센스일 뿐이기 때문에.

폭력은 안 된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사전에 "내가 당신을 쏠 게요."하고서 사전에 고지하거나, 이토 히로부미하고 협의 본 적 있는가?

그 건 평화롭고 합법적인 폭력이자, 저격이었는가?

우리는 갈 '지' 자 우왕좌왕 식견을 가지고 있다.


자명한 것은, 이런 비극은 앞으로 벌어 져서 안 된다는 것인데, 그 해결책이 윤리적으로 그 사람을 가해자, 죄인으로 취급하고, 법으로 처단하는 것이 다가 아니란 것이다.

만일, 그 선에서 그치고 만다면, 지금 그 사람의 벌인 행위를 법에 의거한 형량, 처벌로 교환, 거래하고 마는 것이다.


"너가 이만큼 해를 입혔으니까, 너도 이만큼 고통당해라."


그러나 이 것은, 내가 범죄를 저질러도 손해볼 게 없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미래의 잠재적 범죄자를 막는 것이 아니다.

피해를 입었으니까, 너도 이만큼 당한다는 접근은 거래로 끝나고 만 것이기 때문에.

그럼 처벌받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 갈 테고, 누구는 그 것을 돌발 행동으로 표출할 것이다.

그럼 역사는 계속 우리가 우리를 서로 역할에 따라 서로 공격하고 공격받는 세상을 계속 살아 갈 테고.


이재명 대표를 공격한 사람은 마땅히 법에 의거해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

그 사람이 처벌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너무 눈에 보이는 빙산의 일각만 보고서 누구는 범죄자, 누구는 피해자라는 그릇된 관점으로 조리돌림을 하고 있다.

이 것은 중세 아즈텍 왕국이 산 사람을 제물을 바치는 미개한 행위의 문화적으로 고도로 발달된 행태에 다르지 않다.

내가 한 것은 철저히 잘못이 없이 정당하고, 타인이 한 것은 엄격한 기준으로 죄인으로 몰아서 실컷 공격해서 감방에 몰아 넣고.

그러다 잘못 걸리면 나도 거기에 당하는 것이고.


모두가 힘든 세상, 모두가 윤리적으로 100 점 짜리를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내가 그렇 듯, 타인도 그럴 것이란 생각을 가진다면, 조금은 그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이해하게 되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비록, 작은 열쇠지만 거대한 철문을 손쉽게 열 수 있는 것처럼.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잘못됐다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았는 지, 나도 저런 상황에 처하면 어떨런 지, 나 자신을 돌아 보면서 상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틀렸다, 잘못됐다로 상대를 오해할 일도 없을 것이고, 잘못된 게 없으니 공격할 일도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당부코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만이라도 겉만 보고서 현상을 결론 내리지 말고, 심도 있고 다각도로 생각하고 연구하면서 왜 그런 현상이 벌어 질 수 밖에 없게끔 상황이 그 사람을 몰아 갔는 지, 연구하고 나에게도 나도 모르게 저런 점이 있지 않는 지, 자신을 돌아 봤으면 한다.

그 사람이 든 칼, 그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그 칼을 쥐도록 몰아 간 다수의 사람들이 말로 찌른 칼이다.

그 사람은 분명 그 칼에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사회질서 유지 차원에서 부득이 처벌을 받아야 겠지만, 그 사람이 받은 그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 만져 줄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재명 대표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것처럼, 그 사람 또한 그런 상처가 쌓여서 분노로 표출한 것이다.

단순 겉만 보고서 범죄자다, 가해자라는 빌미로 더욱 공격을 하는 것은, 너무 수면 위의 빙산만 보고, 그 빙산 아래의 거대한 몸체는 보지 못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런 지.

그 동안 그 사람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

돌을 던지기 전에, 그 것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치유가 가능하다.

그래야 사회적 악순환이 멈춘다.


그 동안에 우리는 너무 칼을 드는 데 익숙했다.

이젠 꽃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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