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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Oct 26. 2024

진정한 윤회와 해탈

불교에 이르길, 사람은 죽어서도 끝이 아니라, 다음 세상에 환생해서 태어 나는 것을 반복하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빠져 있다고 한다.

또, 자신의 업을 소멸해서 '해탈'에 이른다고 한다.

'윤회'와 '해탈'이라는 단어가, 불교의 고유한 단어로 고착되어 있는 바, 나는 '윤회'와 '해탈'에 대해 이 시대의 새로운 생명력의 숨결을 불어 넣으려 한다.


'윤회'는 모두 알다시피 사람은 삶과 죽음을 연속적으로 반복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윤회를 인간이 살면서 깨닫지 못 해 반복적으로 범하는 어리석음이라고 이름짓는다.

불교의 윤회는 '삶과 죽음'을 기준으로 하지만, 나는 인간이 사는 동안의 행위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또, '해탈'은 죽어서 도달하는 어떤 특정한 곳, 특정한 공간, 특정한 정신 상태가 아니다.

해탈은 내가 살면서 직면하는 어떤 고난, 장애, 구속 등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살면서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일평생 동안 돈을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순위로 여기며 살아 간다.

그렇다면, 돈이 아닌 다른 가치들은 그보다 차선적 가치로 책정되는 것이다.

그가 돈이 아닌 다른 가치들을 배척하지 않으며 살아 가는 것은 '윤회'가 된다.

돈은 경제라는 측면에서, 재화 및 용역적 가치 측면에서 분명 요긴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유형, 무형의 가치는 거의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어떤 것들, 명예나, 신뢰, 정의, 이런 것들은 돈으로 대체가 불가하다.

돈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살아 가게 되면, 이따금 이러한 정신적 가치를 훼손하거나, 침탈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만일, 그 자가 눈을 떠서 "돈이 세상살이의 최고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라는 작은 깨달음으로 다른 가치들을 탐구해 나가기 시작하면, 돈을 소중함을 배척하지도, 역으로 정신적인 가치에 전도되지도 않은 균형적인 삶을 살아 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한 가지 음식과 한 가지 반찬으로만 살 수 없듯, 물질적 가치만 추구하며 살다 보면, 정신적으로 결핍하고 메마르게 된다.

그래서 종교를 찾고, 철학을 찾고, 학문을 습득하는 것이다.

다양한 질료의 균형있는 추구가 중요한 것이다.


집착을 할 때는 다른 가치들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나한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내 앞에 다가와서 내 손에 쥘 수 있어도, 내가 그 것을 지나쳐 버린다.

나중에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을 우리는 삶에서 '후회'란 단어로 적는다.

깨달아야 비로소 삶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고, 이해를 하고 나서야 그와 같은 우를 더 이상 범하지 않는다.

그 걸 깨닫기 전까지 계속 집착 속에 속박되어 윤회한다.


깨닫고 나면 길을 몰라서 헤맸던 것이지, 알고 나서는 내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고, 그 길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더 이상 한 가지 가치를 으뜸으로 여기지 않고, 이제부터 모든 가치들을 고루 수용할 수 있는 지혜가 트인다.

과거의 삶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더 이상 그러한 잘못의 반복을 그치는 것, 그 것이 바로 진정한 '해탈'인 것이다.

죽고 다시 태어 나는 과정의 반복이 아니라, 살면서 어리석은 삶의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탈출하는 것, 그 것이 바로 '해탈'인 것이다.


인간이 삶 속에서 끊임없는 행위를 하고, 그 행위 중 잘못된 것인 줄 모르고 잘못을 범해서 스스로 그 안에 구속되는 것, 한 가지에 집착하는 것, 벗어 나고 싶어도 원인을 몰라서 발버둥 치는 것, 무언가에 중독되어서 스스로 자박에 빠지는 것, 허망한 환영을 실존한다고 믿어, 인생을 탕진하는 것, 그래서 계속 악순환의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 나지 못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윤회'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업을 지어라, 업장을 소멸하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나의 업장이고, 나의 굴레란 말인가.

내 죄값은 내가 치르는 것 쯤을 모르는 이가 없건만, 내 잘못으로 인한 벌을 받는 게 억울하지는 않는데, 무엇이 내 죄란 말인가.

또렷이 답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내 삶의 무언가 괴로움이 있다면,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그로 인해 그 괴로움의 속박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그 현상 자체가 나의 잘못이 있음이 증거이다.


내가 바르게 살았다면, 그로 인해 내가 괴로운 법칙은 없다.

만일, 정말 내가 바르게 살았음에도 삶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나 혼자의 착각으로 그렇게 여긴 것인 지, 정말 바르게 살았는 지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다시 재점검해야 한다.

내가 바르게 살았는 지, 바르다고 여긴 것을 믿고 스스로 그렇게 살아 왔는 지.

이 둘은 엄연히 다르다.


내가 누군가의 물건을 훔쳤다 해서, 화가 나서 욕을 하고 때렸다고 해서, 그 자체로 어떤 윤리적 죄의식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 아니다.

내 삶의 문제점을 찾지 못 하면, 그 것에 대해 문제라고 인식하지도 않을 테고, 문제가 아니라 여겼던 것이 비로소 문제가 있음을 '깨닫'지도 못 할 것이고, 깨닫지 못 하니, 바른 길을 찾지도 못 할 것이고, 때문에 악순환을 삶을 계속 살아 갈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인간이 '윤회'하는 것이다.

그냥 때 되면 저 세상 가고,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고, 이런 무의미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고.


내 삶의 문제를 '문제'라 인식하지 못 하는데, 어떻게 악순환의 윤회에 벗어 나겠는가.

알고 깨우치고 나면,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는, 극히 단순한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내 삶의 문제를 내 안에서 찾기 시작하는 것이 '수행'이고, 비로소 그 원인을 찾으니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되니, 앞으로 문제가 되는 행동을 저절로 안 하게 될 것이고, 내 잘못된 버릇을 고치는 것을 '수련'이라고 하는데, 수련을 반복해서 내 잘못된 습관이나 버릇을 고치면서 내 행동을 교정시켜 나가면서 점점 '윤회'에서 벗어 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비로소 마지막 남은 모든 윤회에서 벗어 나서, 더 이상 윤회의 수레바퀴에 존재하지 않고 탈출하는 것을 비로소 '해탈'이라고 한다.


나한테 가장 작고 사소한 안좋은 버릇, 습관들, 그런 것들 조차 고치지 못 하면서, 더 큰 윤회에서 해탈하는 법칙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고쳐 나가는 노력이 반복이 될 수록 더 큰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이는, 죽어서가 아니고, 살면서 일어 나는 것들이다.


해탈은 기적도 아니고, 죽어서 일어 나는 현상이 아니다.

내가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 끝에 접하게 되는 아주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삶, 그 자체이다.

누가 보상으로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를 열심히 믿었다고 고승이 칭찬하지도, 석가모니 불상이 해탈시켜 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 그렇게 살아 지는 것이다.

나중엔 내가 살면서 나를 구속시켰던 짐들도 사라 지고, 윤회도 사라 지고, 다 사라 진다.

무엇도 나를 구속시키지 않는 무한한 자유 속에,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 가게 된다.


내 코 앞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 하면서 수천 년 전, 인도의 누가 "그랬다더라."를 열심히 믿는다고 해서 내가 극락왕생하는 것 따위는 없다.

내 삶의 문제, 내가 현실 속 반복하는 잘못을 개선하지 못 해, 작은 해탈도 이룩하지 못 하면서, 불경에 써 있는 것처럼 '피안 너머의 고통없는 곳으로 열반' 따위는 어림도 없다.

정녕 해탈을 원한다면, 공허한 하늘을 쳐다 보고 가만히 있는 막연한 믿음을 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선을 불상이 아니라, 나 자신, 내 삶 속으로, 내 생각과 일거수일투족으로 돌려야 한다.

현실 속 작은 허들조차 넘지 못 하면서, 어떻게 해탈이란 큰 허들을 넘겠는가.


이제, 해방되어야 한다.

껍데기 해탈이 아닌, '진정한 해탈'을 누려야 한다.

실현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진정한 윤회고, 무엇이 진정한 해탈인 지 몰라서 못 하는 것이다.

해탈과 자유는 동의어이다.

'해탈'이라고 해서 종교적 의미이고, '자유'라고 해서 이념적 의미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인구가 70억이 넘는다고 하는데, 각자 추구하는 것은 다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 것은 바로 궁극적으로 '자유'에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절망, 고난, 속박, 편견, 집착, 허영심, 욕망, 어리석음으로부터 '해탈'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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