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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Sep 21. 2024

욕심과 만족

무엇이 욕심이고, 무엇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일까?

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데, 진정한 만족은 무엇을까?

내 생각을 써 본다.


나는 좋은 게 좋다.

나도 좋은 집, 외제차, 많은 돈, 터가 좋은 곳이면 토지나 건물이 탐이 난다.

위에 열거한 것 중, 나한테 해당 사항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현실은 전혀 턱도 없지만서도.

나 역시도 세속적인 사람이란 걸 역설하는 것이다.


또, 어디서 돈이 솟아 나는 지, 좋은 오디오 기기라면 기차 여행, 1박 모텔 외박을 해서라도 데리고 온다.

쓸 때는 기탄없이 쓰지만, 아끼기를 작정하면, 한정없이 안 쓴다.

고정적인 지출은 줄이고, 인터넷 최저가 검색은 달인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없던 돈이 솟아 나지는 않지만, 달아 날 돈을 많이 붙잡아 모았다.

그렇게 해서 오디오를 장만했다.


몇 달 전에는 수원까지 가서 스웨덴제 하이-엔드 '요르마' 케이블을 구입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얼른 연결해서 소리를 듣는 순간, 소리가 너무나도 좋아 져서 참 감격스럽더라.

우연스럽게 어찌어찌 돈이 생겨서 어렵사리 구입했는데, 역시 돈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질만능주의의 일환으로 돈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기반으로 한 화폐 경제 시스템, 자본주의가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비싸디 비싼 요르마 케이블을 연결해서 음악을 들으며, 불쑥 이런 욕구가 또 올라 왔다.


"아니, 동메달 짜리가 이렇게 좋으면, 은메달, 금메달 짜리는 얼마나 좋은 거야?", 빨리 다른 케이블도 '요르마'로 바꾸고 싶다."


그렇다.

인간의 심리가 자연히 그런 것이다.

내가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데, 옆 손님이 간짜장을 먹고 있는 것을 부러워 하고, 그 간짜장을 먹던 손님이 옆을 돌아 보니, 삼선짜장면을 먹는 것을 부러워 한다.

탕수육 대 자 하나에, 빼갈도 한 병 시켜서 같이 먹으면 아주 진수성찬이겠지.


이렇게 인간의 욕심은 한정없다.

계급이나, 직책, 권력을 지향하는 것도 이와 같다.

한 단계 올라 가면, 더 높은 자리를, 막상 그 자리에 오르면 또 더 높은 자리를.

그 것이 잘못됐다, 인간은 탐욕스런 존재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것인가.


그런데, 한 번 쯤은 내 자신에게 물었으면 한다.

나는 지금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살고 있는 지, 현재에 만족하며 살고 있는 지.

현재에 만족하며, 현실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에게도 충실한 만큼 그 결과물이 주어 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하는 사람도 똑같이 그에 합당한 결과물이 주어 진다면.

전자는 현실에 만족하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 가는 반면, 후자는 무언가 결핍된 상태에서 투쟁적으로 살아 간다.


얻기 위해 얻으려 하지 말고, 되기 위해 되려고 하지 말자.

지혜로운 사람이 전자이다.

내 일과 역할은 내 몫이지만, 처우나 보상은 타인에게 주어 지는 것임을 알 때, 내가 나를 위해 타인으로부터 보상을 얻기 위한 삶을 임한다기 보다, 내가 그 전에 먼저 사회와 타인에게 진정 도움이 되려는 생각만 하자.

내가 현재 그래도 이만큼 누리고 있는 것은, 내가 그만큼 세상과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보탬이 된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인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정확하고, 바르게 돌아 간다는 것을 자각할 때, 욕심은 비로소 사라 진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 진 것에 감사하고 자족하면서 또 미래를 위해서 살아 가는 것.

그 것이 진정한 '만족'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은 타인의 것을 억지로 빼앗으려 하거나, 질투하지도, 탐하지도 않는다.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고, 더 부유하고 행복해 보인다면, 그 건 그 사람에게 마땅하게 주어 진 것이다.

그 배경이나 큰 그림을 보지 못 한 채, 상류층이나 부유한 계층을 탓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타인을 잘 살도록 돕지 않은 자는, 나도 도움을 받지 못 하고, 더 질좋은 삶을 누릴 수도 없다.


내가 나에게 주어 진 여건 안에서 나보다 어렵게 살아 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지, 내가 나보다 나은 사람한테는 무얼 배우고 섭렵할 수 있을 지를 생각해 보자.

그 사람에게는 길이 열리고, 더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다.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은 자신의 채우지 못 한 욕심으로 불만족을 느끼거나, 현실에 불평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늘 마음이 편안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힘들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지 않는다.

방송에서 나오는 자연인이나 스님처럼 산다는 것이 아니라, 내 역량에 벗어 나는 것, 내가 손에 쥘 수 없는 것을 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뭔가 현실에 만족하지 못 한다면, 혹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여서 그 걸 위해 살아 간다면.

나 자신에게 자문해 봐야 한다.

나에게 주어 진 여건이 내가 노력한 것에 비해 정말 부족한 것이기 때문인 지, 아니면 내 노력이 부족해서인 지를.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손에 쥐어 질 거라 생각하지만, 내 계산법을 넘어 서, 실제로는 훨씬 멀고 힘든 길일 수도, 혹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을 투명하게 맑힌 사람한테는 나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 그 것이 현실로 실현 가능한 것인 지를 알 수 있다.

내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하면, 내가 가공해 낸 환상에 빠져서 귀한 인생을 허비한다던 지, 내가 쥘 수 없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평생을 뼈다귀를 위해 달려 다는 개처럼 힘들게 살아 간다.


실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옛날 중국에는 늙지 않는다는 풀떼기를 캐려고 하질 않나,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회개하고, 이천 년 전에 죽은 사람 말을 열심히 믿으면 된다고 하질 않나.

요새는 썩은 우유를 먹으면 건강에 좋다고 하니, 그 걸 마시라는 사람도 있다.

해외 뉴스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 지고 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욕심은 내가 노력해서 실현 가능한 것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욕심은 애초에 불가한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결국 욕심이었다는 것, 그 것은 애초에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달은 자는 비로소 욕심을 버리게 된다.

욕심을 내가 버린다고 휴지통 쓰레기 버리 듯이 휙 버려 지는 게 아니다.

내가 거기에 현혹당하면 나는 욕심에 지배 당하는 것이고, 나 자신을 맑혀서 욕심과 바른 정도를 분간해 낼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자만이 더 이상 욕심을 갖지 않는다.

애초에 허망한 것임을 아는데, 왜 그런 부질없는 환상에 인생을 낭비해야 하는 지를 절로 아는 것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는 것이요, 그 것도 나에게 감사한 것이다.

욕심을 버린 자만이 현실에 만족할 수 있는데, 무엇이 욕심인 지, 바른 길인 지를 분간해 내는 과정이 나를 맑히는 '수행'의 여정인 것이다.

목욕이 내 육신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면, 수행은 내 마음, 정신을 맑히는 것이다.

그 것은 금불상에 천 번 절해서 맑혀 지는 것도 아니고, 이천 년 전에 나무 막대기에 매달려 처형당한 자를 열심히 믿는 것이 아니다.

철저한 나 자신에 대한 탐구, 엄격한 나 자신에 대한 매질, 추궁, 내 아집과 견해를 비우면서 상대방 하나 하나를 통해 세상을 받아 들이면서 배워 나가는 여정인 것이다.

그 것이 수행인 것이다.


나 자신을 비우면서 투명해 진 자는, 무엇이 욕심인 지, 무엇이 허망한 것인 지, 참되고 진정한 것이 무엇인 지를 투명하게 볼 수 있다.

내가 보려고 눈을 부릅 뜨고 보는 게 아니라, 저절로 환하게 보여 진다.

나를 찾아 나가는 길을 가는 자가 수행자이며, 그 것은 어떤 종교 단체에 열심히 종신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직업이 청소부이든, 대단한 권력가이든, 그 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를 채우는 게 욕심의 길이라면, 거꾸로 나를 비우는 것이 수행의 길이다.

비워야 투명해 진다.

욕심을 버리면, 그 자리에 만족이 자리한다.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정확하게 돌아 간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나를 둘러 싼 환경과 위치는 정확한 내 자업자득임을 깨달을 때, 남을 탓할 이유도, 빼앗아야 할 이유도, 싸우거나 투정할 이유도 다 사라 진다.

다 내 자업자득인데, 누굴 탓한단 말인가?

결과물이 마음에 안 든다면, 오롯이 내 탓이기에 오로지 내 안에서 원인을 찾아서 고칠 일이다.

또, 내가 잘못한 것이기에 억울할 것도 없다.

모든 게 내 계산 착오였고, 내 미숙함에 벌어 진 일이다.

그래서, 깨달은 만큼 삶에 불만이 없고, 내가 찬 밥에 김치 한 쪼가리 없어도 만족하는 것이다.

그 게 수행자의 삶이다.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는 와중에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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