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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선 Aug 21. 2024

범사함에 감사함

나는, 우리가 살면서 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사소한 모레 한 톨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일 지라도, 그 것들은 공짜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비가 내려서 저절로 논, 밭에 뿌려 주고, 내가 숨을 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기를 마시고 뱉는 것처럼.


또, 눈이 떠지면 일어 나서 식사를 하고, 적당히 씻고 언제나처럼 밖을 나선다.

밖에는 나처럼 숱한 자들이 가정을 나와 사회라는 일선으로 활동하러 나온다.

버스와 차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지하철에도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한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러한 연속적인 일들의 반복, 이 것들이 감사할 일인가?


내가 이 세상에 괴리돼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수록 감사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되어 지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를 중심으로 나와 가까운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고마울 수 있어도, 이 커다란 하나의 지구, 우주에 고마움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나대로 살아갈 뿐,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 저절로 돌아 갈 뿐.

고마울 일이 아니다.


만일, 내가 오늘도 권태로운 나날의 반복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했다면.

내가 숱하게 반복하는 일상은, 나 혼자 빚은 지난한 일상이 아니다.

시계 태엽처럼 맞물려 있는 커다란 사회, 우주라는 하나의 유기체 속에서의 상관관계의 함수로 도출된 지금인 것이다.

내가 원튼, 원치 않든,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늘의 지난한 일상은, 지구 어딘가에 있을 이름도, 얼굴도 모를 누군가, 누군가'들'에 의해서 지탱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는 나 혼자 살아 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것은 사회란 바닷물의 물 한 방울이 가진 작은 생각일 뿐이다.

물 한 방울은 따로 떼어 있을 때 분리된 나 혼자라고 생각되어 지지만, 커다란 바닷물에 합수되어 버리면, '나'란 사라 지고 커다란 바닷 물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내가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삶을 살아 간다고 생각이 들 때, 이런 삶 조차 누리지 못 하고 살아 가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려 봐야 한다.

어쩌면, 그들은 내가 느끼는 것처럼 마땅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살아 갔기 때문에 방종해 졌고, 그래서 어려운 삶을 살아 가는 것일 지도 모른다.

감사해야 할 일에 감사하지 않으니, 나는 세상을 위해 무언가로 보답할 생각을 할 필요성이 없을 테고, 내가 세상에 보답하지 않으니, 나에게 마땅히 주어 지는 것들도 점점 약하게 돌아 오게 된다.


"어? 저 번 달에는 400만 원을 벌었는데, 이 번 달은 300만 원 밖에 못 벌었네?"


내가 무인도에 뚝 떨어 져서 나 혼자서 어떻게 400만 원을 벌 수 있을까?

나의 능력과 소질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존재하기에 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경제적인 형태로 보수를 받아서 그 돈을 나 혼자 획득할 수 없는 어떤 가치나 재화들을 다른 '누군가'로부터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만일,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 조차도 무인도에 떨어 진다면, 마트에서 채 얼마 하지도 않는 생선 한 마리 잡기도, 벼 한 포기도 수확하기 힘들 것이다.

얼마나 고마운 일들인가 말이다.


뉴스를 통해 지금도 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 범죄의 피해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리거나, 절망하여 생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사람들, 외에도 병마에 신음해서 병원 천정을 온종일 쳐다 보는 사람들,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게 살아 가는 사람들.


나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때마다 기적이 일어 난 것 같다.

도둑이 와서 값진 것들을 가져 간 일도 없고, 모든 집기들이 제 자리에 그대로 있다.

너무 조용해서 평화롭기까지 하다.

태풍으로 산사태가 나서 토사가 우리 집을 덮친 일도 없고, 화장실에 일을 보고 나면 막힘 없이 물도 잘 내려 간다.

또, 내가 귀가하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다치기를 했나, 안 좋은 일이 벌어 지기를 했나.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하게, 아주 마땅하게 내가 보장받아야 할 평화와 안전함일까?


미안한 비밀 딱 하나만 얘기를 해 준다면, 내가 오늘 무사한 것은, 나 대신 안 좋은 일을 당한 당신들 때문에 내가 무사태평한 것이다.

그런데 너무 얄밉게 생각하거나, 불공평하게 생각 안 했으면 좋겠다.

이따금 나도 그런 일을 겪을 때면 괴롭고, 그럴 때마다 유유히 무표정하게 길을 걷는 누군가를 보며 부러운 생각이 드니까.


적어도 내가 보고 겪었던 안 좋은 일들의 희생자가 되기 싫다면, 혹은 내가 마땅하게 누리는 평화로운 권태로움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그래서 작은 무언가라도 갚고자 한다면.


내가 무감각하고 당연하게 느끼는 무료함을 지탱하기 위해 나 대신 어려운 삶을 살아 가는 이들의 얼굴을 돌아 보라.

한 번 쯤.

한 번 쯤 말이다.

세상이 썩었다고, 말세라며 혀를 차지 말고.

나는 누리면서 나를 위해 대신 어려움을 감수하는 이들을 위해 아무런 보답을 하지 못 한다면, 다음은 내가 보고 겪었던 어려움을 몸소 받으면서 갚아 내야 할 것이다.

아무 것도 안 하면 다음 차례는 나라는 것이다.

세상에 힘든 사람들이 많은 것은, 내가 그 것들을 보는 한 가운데 자리하면서, 무엇 하나 보태 주지 못 한 나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 것에 대해 미안하게 여기면서 어떻게 도울까를 생각하지 못 한다면.

그들이 그렇게 감사함을 몰라서 어려워 진 것처럼, 나도 그들처럼 살아 갈 수 밖에.


나는 그에 반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다지 변변한 것을 해 주지 못 했으면서 무사태평한 나날을 살아 가고 있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겠는가.

힘들게 살아 가는 이들을 돕지 못 했으면서, 나는 삼시 세 끼니를 보전받으며, 사지육신 멀쩡하게 살아 간다.

이 게 기적이 아니고 뭐냔 말이다.


범사의 소중함은 그 것이 박탈되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된다.

물에 빠졌을 때는 공기의 소중함을.

길을 헤맬 때는, 지도 없이 누군가 먼저 헤매면서 그려 낸 상세한 지도 한 장의 소중함을.

배고플 땐 노동하면서 일궈 낸 값진 쌀 한 톨과 지폐 한 장이.

이토록 소중한 것을 하찮이 여길 때 결국 그 작은 것들에 대해 박탈되고 나서야 다시 소중함을 느낀다.


범사는 내가 저절로 눈뜨고 가만히 있는다고 저절로 주어 지는 범사가 아니다.

우리가 보고도 느끼지 못 하는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 위에 누리는 복이다.

범사는 무료하고 권태로운 것이 아니다.

알고 보면 나날이 벌어 지고 있는 놀라운 기적이다.

어째서 범사에 감사하지 못 하나.


주변을 돌아 보라.

내 방, 내 연락처에 저장돼 있는 많은 사람들, 내 가족들, 그리고 이 커다란 세상 전체.

난 '범사'란 기적 속에 살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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