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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Apr 12. 2024

봄을 기억하는 방법

Episode 12. 향기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서 참 좋겠어."


이런 말 들어 본 적 있으신지. 나는 한때 '편리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으로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무슨 큰 죄를 지어 경찰서 진실의 방이나 청문회장의 증인석에 앉아 일방적으로 추궁당한 것은 아니고. 여자친구가 불시에 던진 질문 - 그때 그거 기억나지? - 에 순발력 있게 대응을 못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버리는 상황이 종종 발생했던 것이다.


문제는 발연기만큼이나 부족한 기억력. 삶의 의욕이 없어 매사를 심드렁하게 대하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나는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그때 그것'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미안하고 답답했다. 태어날 때부터 기억장치의 저장용량이 적었던 걸까 아니면 어딘가 심각하게 훼손된 배드 섹터가 있어서 정보가 입력되자마자 조각조각 흩어져 버리는 걸까(지금껏 별로 나아지지 않은 걸 보면 둘 다일지도).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네댓 살 즈음인 것 같다. 연탄화로 앞에 쭈그려 앉아 대합을 굽고 있는 어머니, 큰아버지의 병문안을 마치고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들던 아버지... 짧게 반복되는 흑백의 무성영화 속에 등장하는 부모님의 얼굴은 흐릿하기만 한데 그때의 냄새 - 연탄가스와 소주와 꼼장어 - 만큼은 이상하게도 또렷하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냄새의 조합인 셈이다.   


내가 봄을 기억하는 방법도 비슷한 것 같다. 노랗고 하얗고 발그레한 꽃들이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어도 새큼하면서 톡- 쏘는 벚꽃향을 맡기 전까지는, 라벤더향에 청량함을 더한 길마가지나무의 꽃향기가 언덕을 넘기 전까지는, 달콤한 비누 같은 미선나무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지기 전까지는 봄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봄은 빛깔로 시작되지만 결국 향기로 기억된다.




웅웅 거리는 날개소리로 꽃이 핀 것을 알아채기도 했었는데, 몇 해 전부터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꿀벌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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