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레스트 Feb 15. 2024

이른 봄, 숲 속의 연예인

Episode 06. 하루살이풀꽃

몇 해전 일이다. 최재천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 한 번은 가봐야지 했던 서천의 국립생태원으로 향했다. 꽤 먼 거리였지만 의외로 막히는 구간이 없어 쉬지 않고 내려갔다. 그런데... 너른 주차장에 차가 한 대도 없다.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서리가 내려앉은 연못가에는 오리들이 날갯죽지에 고개를 박고 돌덩이처럼 굳어있다. 추운 날씨 탓인가? 멀리서 새벽길을 달려온 나를, 취침 중인 오리들이 반갑게 맞이해줘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그렇지,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다.


생태원 입구는 한 사람이 통행할 정도로만 열려 있고 매표소는 굳게 닫혀 있다. 웹사이트에 휴관한다는 공지가 없었는데 무슨 일이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직원들이 나타났다. 그래, 이제야 개관시간이 된 모양이구나! 반갑게 인사하는 나를 발견한 직원들의 표정이 영 어색하다. 놀라움 반 안타까움 반 정도. 아니나 다를까. 코비드 경보단계가 격상되고 조류독감의 위험이 있어서 오늘 모든 실내 전시는 취소되었으며 대부분의 야외전시구역은 폐쇄되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복수초라도 보고 가시죠."


그렇게 해서 복수초를 처음 보았다. 입춘이 막 지났을 즈음이었다. 잔디밭 양지바른 곳에 노란색 꽃들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별을 쫓는 접시 안테나처럼, 꽃은 정확히 -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목하게 오므린 꽃잎 안으로 햇볕이 모여 마치 백열등을 켜놓은 듯이 환하게 빛났다. 그 옆에 서리를 맞은 채 선 꽃봉오리는 따개비를 닮아 거칠고 단단해 보였고 그 아래로 털목도리를 닮은 작은 잎들이 숨어 있었다.


'내가 너를 만나러 왔구나!'


복수초의 속명은 아도니스 Adonis.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미남 중의 미남. 여신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 모두 그를 심하게 아끼는 바람에 결국 두 집 살림을 해야 했다. 아도니스도 취향이라는 게 있었을 텐데... 어쨌든. 반년은 지상에서 반년은 지하에서 살아야 하는 그의 삶은 복수초의 생태와 많이 닮았다.


복수초는 이른 봄에 스스로 열을 내서 지상으로 올라와 꽃을 피운다. 아직 다른 풀과 나무들은 겨울잠을 자고 있고 날벌레와 꿀벌들이 슬슬 활동을 시작할 때다. 경쟁자를 피해 수분을 하고 햇볕을 충분히 받아 에너지를 모은다. 그러다가 풀이 자라고 나뭇잎이 달려 그늘이 지기 시작하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땅 위에서 사라진다. 그리고는 다음 해 봄이 올 때까지 땅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주위의 관심은 홀로 받으면서도 사람들의 지나친 시선은 싫어하는 것이, 숲 속의 연예인이랄까.


국립생물자원관에 따르면 이른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이 오기 전에 씨앗을 맺고 사라지는 봄꽃을 Spring Ephemeral, 우리말로 '하루살이풀꽃'이라 부른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한계령풀, 갈퀴현호색, 모데미풀, 앉은부채, 노루귀, 꿩의바람꽃, 얼레지 등이 있다. 다들 이름이 참 예쁘다. 오랫동안 우리 산과 들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대부분 멸종 위기를 맞고 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수목원에서도 이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운이 좋아 정말 때를 잘 맞춰 가더라도 카메라를 든 분들이 진을 치고 있어 한참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연예인의 삶은 괴롭다.  

작가의 이전글 판다가 될 뻔한 메타세쿼이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