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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바라기 Aug 21. 2023

2. 부러진 다리, 부러진 내 마음

이미 나는 몇 달 전부터 한쪽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부어서 다리를 더 이상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언덕도 많고 교과서들도 너무 무거운 데다가 꽤나 넓었던 기숙사 학교를 돌아다니기에 목발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한 달 정도 목발로 돌아다니다 양 옆구리가 모두 물집이 생겨버렸고 결국 휠체어를 탈 수밖에 없었다. 전부 계단밖에 없던 학교였고 과목별로 반을 옮겨 다니면서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그때마다 한 다리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콩콩 점프를 했고..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휠체어를 옮겨줬다. 한마디로 민폐 중의 민폐였다.


마치 괜찮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휠체어에 앉아있었고 아직 어렸던 친구들도 그저 해맑게 나를 복도에서 밀어주기도 하고 장난치기도 했다. 걷지 못할 뿐이었지만 내 삶은 이미 180도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쿨한척해도 이미 난 많은 활동들에서 배제되고 있었고 그만큼 친구들과도 함께 할 수 없었다. 속상했고 답답했지만 그래도 끝이 있을 줄 알았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진작에 병원을 안 갔냐고?

아니다. 다녔다.. 한국에서도 갔었고 미국에서도 갔었지만 검사 결과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대용량 에드빌만 매일 먹으면서 참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면서 기숙사 생활하기란 정말이지 힘들었다. 기숙사 생활한다는 것은 혼자 청소, 빨래 등 모든 생활을 혼자 한다는 것. 화장실도 내가 있던 기숙사는 공동 화장실과 샤워실을 사용하고 있었고 필요한 생필품이 있으면 주말에 한두 번 사감선생님이 셔틀에 태워 마트에 갈 때 장을 봐야 했다.


갑자기 휠체어의 생활은 생각보다 많이 불편했다. 도와주는 보호자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일상을 매일 휠체어와 목발로 생활한다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 몰랐다. 매일 휠체어를 타고 빨래랑 세제들을 무릎에 가득 담고 빨래방으로 가서 한 다리로 일어서서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샤워실 도구 무릎에 올려놓고 한 다리로 콩콩 뛰어서 마치 학처럼 한 다리로 서서 샤워를 하고..장애인 화장실도 없었기에 휠체어는 밖에 두고 한 다리로 콩콩 거리면서 볼일도 봤다. 아무리 튼튼한 다리였지만 힘들어서 후들후들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순간들도 많았다.


밤 9시

이 시간이면 7시부터 9시까지의 study hour가 끝나 두 시간 동안 방문을 활짝 개방했다가 드디어 닫는 시간이다. 등교 준비도 하고 다 못한 숙제도 하고 잘 준비도 하고 친구들이랑 마저 수다도 떨고 하는 시간. 나도 다른 날들과 똑같이 내일 입을 교복이 다 건조되어 옷장에 걸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방안은 좁은 관계로 휠체어 대신 목발로 이동하곤 했다. 목발 중 한 개로 지탱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옷걸이를 들고 교복을 옷걸이 봉에 걸었다. 아니… 걸은 줄 알았다…


휘청휘청.. 우당탕탕..!!!


옷걸이가 걸린 줄 알고 무게중심을 옷걸이에 두었는데 봉을 놓치면서 중심을 잃고 장롱 속으로 넘어졌다.


으아아아아아악!!!!!

끔찍한 고통이 온몸에 퍼졌다. 장롱 밑에 가지런히 놓은 운동화들 위로 몸이 구겨져 있었고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식은땀이 났고 아픈 다리를 그나마 덜 구겨지도록 다른 팔다리로 체중을 지탱하면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계속된 비명에 친구들과 사감 선생님들이 뛰어왔지만 애석하게도 내 방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넘어지면서 목발에 눌려 문이 잠긴 것이다.. 부서질 듯 밖에서 사람들이 문을 두드렸지만 이내 잠긴 걸 알고 마스터 키를 가져와 문을 개방했다. 옷장 안에 구겨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부축해서 침대에 눕혔지만 아픈 다리의 고통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이가 탁탁거리는 소리를 낼 정도로 온몸을 떨고 있었고 ‘제발 살려달라 살려달라’고 속으로 기도만 하고 있었다.


긴급하게 응급실로 실려.. 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난 방에 있었다. 사감 선생님은 타이레놀을 먹으라고 하고는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응급실로 데려가 달라고 했지만 보건선생님이 퇴근해서 자기들이 구급차를 부르면 안 되다며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뭔가 다리가 이상해진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사감 선생님이 준 타이레놀을 먹지 않았다. 먹기 싫었다. 미국 특유의 말도 안 되는 원칙주의로 인해서 고통받아야 되는 게 정말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봐도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에서 원칙을 따지며 구급차를 부를 수 없다니. 극도로 화가 났지만 그 누구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밤 10시

사감 선생님도 퇴근했고, 어떤 시니어 언니 한 명을 내 방에 하룻밤 지내면서 혹시 무슨 일이 있어나지 않도록 옆에 있게 조치하고는 집에 가셨다. 모든 학생들은 소등을 해야 하고 시끄럽게 하면 안 되는 시간이었다. 내 방 불도 꺼졌다. 2000년 초반인 그 당시엔 지금의 카카오톡도 없었고 해외전화도 쉽지 않았다. 엄마한테 전화가 하고 싶었지만, 적어도 병원을 간 다음에 무슨 상황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다리가 어떻게 된 거 같은데 덩그러니 침대에 그냥 있다고 전화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부모님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전화하지 않았다.


‘그래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자. 두고 봐라. 이거에 대한 책임은 누군가는 물게 할 거야’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타이레놀 달랑 2알 주고 가버린 사감선생님을 원망하며 침대에서 꼼작하지 않고 있었다. 밤을 꼴딱 새웠다. 이젠 다리가 마비된 것 같았고 발의 감각이 없었다. 다리는 계속해서 점점 부어올랐고 뜨거웠으며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아팠다. 밤새 계속 눈물이 났다. ‘왜? 왜지? 뭐지? 아니 내가 뭘 잘못했나? 이럴 리가 없는데..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왜 이렇게 내팽개쳐져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고 원망스러웠으며 무서웠다.


아침 7시

해가 떴고 아침이 되자마자 보건 선생님이 연락을 받고 뛰어… 올 줄 알았다. 아침 7시, 8시가 되도 깜깜무소식에 정말 환장할 지경이었다. 사감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더 이상은 못 기다린다고 했지만 보건 선생님 출근이 9시라며 좀만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 참을 만큼 참았는데 더 기다리라는 절망적인 말에 안 되겠다 싶어 펑펑 울면서 친한 미국친구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친구 엄마는 내가 밤새도록 아무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거에 불같이 화가 났고 바로 차를 가지고 오셨다.


아침 9시 반

기숙사 학생이 학교 밖을 나가는 데에는 꽤나 복잡한 절차와 승인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친구 엄마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고 모든 건 본인이 책임지겠다며 사감 선생님께 전화를 했고 곧바로 기숙사로 차를 가지고 오셔서는 나를 뒷좌석에 태우고 응급실로 가셨다. 우연히 이 친구 아빠가 의사였고 내가 응급실로 바로 접수가 될 수 있도록 조치를 하셨다. (나중에 이 사감 선생님은 징계를 받고 잘리셨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라인을 잡고 극심한 고통에 있는 나를 위해 바로 모르핀을 놔줬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무조건 환자 한 사람의 존엄성을 가장 우선시하여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게 우선 원칙으로 환자가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진통제를 투여한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터라 강한 진통제에 나는 곧바로 잠에 빠졌다.


오후 1시

눈을 떠보니 아직 응급실이었다. 친구 엄마가 옆에서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딸같이 나를 예뻐해 주셨던 엄마라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시는 눈빛에 보자마자 펑펑 눈물이 났다. 내가 의지할 사람은 이분밖에 없었다. 눈을 떠보니 다리에는 보호대가 착용되어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 다리가 왜 이런 건지 물어봤지만 친구 엄마는 조심스럽게 아직 검사결과를 기다리고 있고 조금 더 검사를 해야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곧이어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의사가 찾아와서는 한마디로 내 허벅지 큰 뼈가 완전히 두 동강이 났다고 했다. 어떻게 두 동강 난 채로 밤새 있었냐고 미친 짓이었다고 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허벅지가 두동 난 거였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심하게 넘어진 것도 아니었고 그냥 바로 앞으로 거꾸러진 것뿐이었는데 뼈가 왜 부러진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 확인이 안 되다니.. 화가 나면서 다리에 다시 극심한 고통이 올라왔고 또다시 모르핀을 맞고는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난 병실로 옮겨져 있었고 어두컴컴한 사이로 친구엄마가 옆에 계셨다. “곧 있으면 엄마가 오실 거야”라고 힘없이 누워있는 나에게 귓속말로 말해주셨고 정말이지 몇 분 있다가 병실 안으로 엄마가 들어오셨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폭발한 듯 하염없이 엄마에게 안겨 어린 아기마냥 울었다. 내 영혼이 내 몸이 펑펑 울고 있는 듯했다. 아직 어렸던 나는 아직 엄마가 한참 필요한 이제 갓 고등학생인 소녀였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잘 해내고 있었는데 모든 게 무너진 것 같아 내 영혼도 내 몸도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 엄마가 와줬고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안심이 되었다.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엄마였지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아 살았다’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사태가 심각한지 난 곧바로 그 다음 날 시내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인턴 의사가 내 허벅지가 두 동강 난 엑스레이 사진에서 뼈 안쪽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본 것이다. 극심한 고통에 계속해서 모르핀을 맞아 잠들고 깨기를 반복한 사이에 아빠도 한국에서 급히 미국으로 왔다. 대여섯 명의 의사들과 엄마 아빠 그리고 친구 엄마 아빠 모두가 긴 회의를 하고 나와서는 내 병실 침대 앞에 나란히 섰다. 모두가 걱정 한가득한 얼굴과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난 뭔가 이상한가보다 직감할 수 있었다.


내 대표 주치의 교수가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안타갑지만, 다리에 암이 발견되었습니다.
뼈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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