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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바라기 Aug 28. 2023

3. 기적의 시작


주님의 일을 하는데 제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주님 사용해 주세요


철없었지만 간절히 울며 기도했던 중등부 여름 수련회 때의 기도가 바로 떠올랐다. 모태 신앙이지만 교회를 다니다 말다 하던 내가 학교 친구 한 명 따라갔던 교회 중등부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만났다. 잦은 이사와 전학으로 외롭고 마음 둘 곳 없던 나를 하나님이 안아주시고 기다리셨다는 느낌을 받았고 무엇보다 중등부 담당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의 밀착 케어에 감동했다.


아직도 그렇게 뜨거울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던 중 갔던 여름성경학교에서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친구들을 보게 되었는데 이상한 질투가 났다. 내가 더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 마음에 더 열정적으로 진심을 다해서 기도를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 채 알기에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내 안에서 무엇인가 뜨겁게 올라오면서 했던 이 기도는 진심이었다.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 뜨거웠던 기도와 떨림을 암 선고를 받는 그 순간 기억나게 하셨다. 온몸에 전율이 올랐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내 영혼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저는 살 수 있는 건가요?”


“당연합니다. 수술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처럼 뛸 수도 있고 하이힐도 신을 수 있을 거예요. “

안심시키듯 주치의는 대답했다.


“살 수 있다면 됐습니다. “


살 수 있다는 의사의 한마디에 난 아무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앞으로의 고통이 어떨지.. 나의 삶이 얼마나 바뀔지.. 한 치 앞도 몰랐기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살 수 있다는데 걱정할 거 없겠다 싶었다. 아니 몰랐다. 나도 내 부모님도 우리 앞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수술하고 치료받으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가족이나 지인들 중에 암환자가 한 명도 없었기에 솔직히 암이 뭔지도 잘 몰랐다. 언제부터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는지 가벼운 마음으로 질문하던 엄마에게 의사는 정색하면서 말했다.


“이 싸움은 아주 긴 싸움이 될 겁니다.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하세요.”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이제 고등학교를 들어갔고 학기를 다 끝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갑자기 한국으로 가라는 말인지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갑자기 한국에 돌아갈 수 없고 천천히 치료를 받아도 되니 학교를 다니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떼 아닌 떼를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의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는지 알겠지만 그때는 왜 한국에 돌아가라고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국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갑자기 한국에 있는 고등학교를 갈 수도 없고 가서 뭘 어쩌라는 건지 답답한 심정뿐이었다. 그것도 잠시.. 치료가 시작되자마자 우리는 이 모든 고민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의사는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 항암치료를 시작하자고 제안을 했고, 내게 적절한 수술과 치료가 가능할 한국 병원들을 알아봐 주었다. 아산병원,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이 세 곳만 믿을 수 있으니 이중에서만 선택하라고 했고 우린 집과 그나마 가까운 아산병원을 선택했다. 의사들은 해외 전원 준비를 시작했고 나에겐 공포의 빨간약 항암제가 투여되기 시작했다.


다리의 고통으로도 나에겐 충분했다. 이 고통을 감당하기에도 너무 벅차서 수차례의 몰핀을 투여받으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는데 공포의 빨간약 항암제는 정말이지 더 이상 나를 버틸 수 없게 했다. 빨간약이 라인을 타고 들어오는 순간 화학약품 냄새가 콧속과 목에 전해져 매스껍기 시작했다. 어지럽고 울렁거리고 머리 아프고 다리 아프고.. 먹은 것도 없는데 계속되는 구토에 순식간에 반송장 상태가 되었고 의식이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병문안을 왔다. 얼굴이 반쪽이 된 나를 보고 암이라는 것도 모르던 친구들은 깔깔거리며 하던 말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숙제 안 해서 좋겠다~~”

“시험공부 안 해도 되고 진짜 너무 부럽다 ㅋㅋ”

“아니 아프다더니 왜 이렇게 이뻐졌어??”


친구들이 너무 놀래면 어떡하지 걱정하던 나는 철없던 친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예상밖이어서 놀랬다. 그들 눈엔 얼굴이 반쪽이 된 내 상태가 마치 다이어트해서 예뻐진 것처럼 보였던 건지 아니면 마냥 누워 있는 내가 정말 부러웠던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내 마음이 문들어지는 말들이었다. 짧은 교복 치마 입고 생기 발랄한 그들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나한테는 허락되지 않을걸 그제야 뼈저리게 깨달아 마음이 무너졌다. 다른 친구들처럼 공부에 치이고 한창 꽃피듯 예쁠 나이에 난 이 좁은 병실 침상에 갇혀 병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니..  자신들이 무엇을 누리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대화들은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내 마음에 비수로 꽂혀 피가 흐르는 듯했다.


미국 병실에서의 환자 식사는 놀랍게도 핫도그, 햄버거, 샐러드, 수프 등.. 정말이지 죽을 줘도 못 먹을 판에 정말 상상도 못 한 음식들이 나왔다. 물도 울렁거려 못 먹고 갈증이 나서 힘들어할 때 간호사들은 ice popcicle (얼음 아이스크림)을 주곤 했다. 그러면 타들어가고 있는 혀를 이걸로 달래었지만 갈증이 가라앉는 건 잠시였다.


영어도 안되는데 내 옆에서 간호하는 엄마에게도 간병은 고역이었다. 모두들 엄마에게 영어로 질문하고 말을 거는데 알 수도 없으셨고, 진단을 듣고 바로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는 나를 돌보기엔 벅차셨다. 한국처럼 간이 침상도 없고 의자 하나 있었기에 거기서 쪽잠을 자면서 내가 잠들어 있건 의식이 있건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주셨다. 엄마가 유일하게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엄마가 버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였다.


엄마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냉철하고 강인한 사람이다. 내가 아프다는 걸 알았을 때에도 정신을 놓지 않으시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미래를 보던 분이셨다. 그런 엄마의 정신력은 항상 나의 버팀목이 되었기에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쳤을 때에도 나 또한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강인한 엄마였지만 내가 유일한 자랑인 우리 엄마를 보고 있노라면 지켜주고 싶은 장녀의 마음도 컸다. 내가 무너지면 엄마는 버틸 힘이 없다는 걸 알았기에…. 나만 바라보고 산 엄마를 위해서라도 난 살아야 했다. 미국 의사가 간단하게 앞으로 내가 할 다리 수술에 대해서 설명해 줄 때, 가장 좋은 건 다리를 절제하는 거라고 제안했다. 의족 기술이 발달해서 오히려 의족을 차고 다니는 게 생활하는 데에 훨씬 수월하고 편할 거라고 했다. 그때 엄마의 떨리는 눈빛을 보았다. 엄마가 만들어준 우리 아기 발가락 지켜줄 순 없겠냐고 눈시울 붉히며 나에게 부탁했다. 절제하는 게 무서웠던 것보다 엄마가 만들어준 예쁜 내 발을 지키고 싶다고 영어로 의사에게 의견을 전달했다.


한 달 정도 지나고 한국으로 갈 모든 준비가 끝났다. 미국 의사들은 보험사를 통해 의사 한 명을 내가 한국 가는 여정 동안 의료적으로 에스코트할 수 있도록까지 세심하게 준비해 주었다. 거동조차도 못하고 라인도 빼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구급차로 공항에 도착해서 구급대원들이 비행기 좌석까지 들것에 실어 나를 태웠고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함께 온 미국 의사는 고통스럽지 않도록 모르핀을 때때마다 놔주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구급대원들이 비행기 안으로 들것을 들고 들어와 나를 실고서는 ‘응급상황입니다 모두 비키세요!!’ 소리 지르고 있었고 공항 보안요원들 수십 명이 따라 붇었고 덕분에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아산병원에 도착했다.


마치 영화를 찍은 것처럼 정말 요란스럽게 한국에 난 무사히 도착했고 새벽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산병원에서 미국병원의 콜을 받고 나를 담당할 교수와 의료진들이 모두 퇴근하지 않고 기다려준 덕분에 난 바로 한국 의료진들에게 인계될 수 있었다. 내 상태가 그만큼 안 좋았던 거를 체감할 수 있었고 이렇게 무사히 한국에 올 수 있었다는 거에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다. 몇억이 나온 미국 병원비도 모두 유학 갈 때 들었던 유학생 의료보험으로 모두 커버가 되었고 좋은 한국 의료진들에게 바로 인계될 수 있었다는 것도 모두 기적이었다.


그렇게 나에게는 벌써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죽음이 앞에 있었지만 나를 살리기 위한 기적. 내가 결코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던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은 이미 실현되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나를 살리고자 하는 주님의 기적들을 보여주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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