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18. 2024
신윤주 작가의 '여행 가방'을 문학평론가 김왕식 평하다
김왕식
■
여행가방
시인 신윤주
2박 3일
겨울 바다 여행 짐을 싼다.
칫솔 넣고
수건도 3 장 넣고
비누 담고
속옷들도 넣고
넣고, 넣고...
짐으로 꽉 찬 가방이 빵빵,
지퍼가 터질 것 같다.
몇 가지 좀 빼내야
가방이 숨 쉴 수 있겠다.
3 장 넣은 수건은 하나 빼고
양말도 한 켤레 빼고
나도 모르게 담겨 있는
같이 여행 가는 경숙이
미워하는 마음이 제일
무거웠다.
그 돌덩이 같은 미움짐을
빼고 나니
가방에 한결 여유가 생겼다.
사랑과 기쁨, 설렘은
여전히 가방에 담겨있다.
그래도 가볍네.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신윤주 시인의 '여행가방'은 가벼운 여행 짐 속에 내재된 마음의 무게를 통해 삶의 철학과 감정을 절묘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이 시는 여행을 준비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묘사하며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인간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작가의 미적 감각이 빛난다.
시의 초반은 단순한 여행 준비 과정으로 시작된다.
“칫솔 넣고
수건도 3장 넣고”라는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한 문장은 짐을 싸는 행위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일상적 디테일은 독자들에게 익숙함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과정이 단순히 물리적 짐 싸기가 아닌 내면의 정리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시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한다.
특히 시의 전환점은
“같이 여행 가는 경숙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단순한 여행 가방 안에 마음의 무게까지 담겨 있음을 고백하는 대목이다. 작가는 짐을 빼내는 행위를 통해 마음속 미움을 내려놓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 장면은 물질적 정리와 심리적 정리가 긴밀히 연결된 인간의 내적 여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경숙이라는 구체적 인물을 등장시켜 미움의 대상을 명확히 하면서도, 독자가 자신만의 '경숙'을 떠올릴 수 있게 여지를 둔 점은 작가의 미학적 유연성을 보여준다.
또한
“그 돌덩이 같은 미움짐”이라는 표현은 미움의 무게감을 물리적으로 느끼게 한다.
시인은 미움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인간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가방이
“한결 여유가 생겼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물리적 가방을 비우는 행위를 통해 마음을 정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 연은 사랑, 기쁨, 설렘이라는 긍정적 감정들이 여전히 가방 속에 남아 있음을 확인하며 시의 주제를 한층 부각한다.
시인은 가벼워진 가방을 통해 마음의 가벼움을 은유하며 삶의 이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물질적 여유는 마음의 여유로, 그리고 마음의 정화는 삶의 기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작가는 삶에 대한 긍정적 철학을 전달한다.
이 시는 단순한 소재를 통해 심리적, 철학적 깊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작품이다. 여행 준비라는 일상적 행위에 내면의 정리와 삶의 가치를 담아낸 점이 독창적이며, 작가 특유의 따뜻하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돋보인다.
미움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사랑과 설렘을 지닌 가벼운 삶을 꿈꾸는 시인의 메시지는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공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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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주 시인님께
ㅡ
안녕하세요, 시인님.
'여행가방'을 읽고 나니, 가방 안에 있던 제 무거운 짐들도 하나씩 꺼내보게 되었습니다.
이왕이면 똑같이 가방을 싸는 흉내라도 내보자 싶어, 집에 있는 여행 가방을 펼쳐두고 따라 해봤지요. 칫솔 넣고, 수건 넣고, 비누 넣고... 그런데 큰일입니다. 한참을 넣다 보니 가방이 아니라 제 마음이 빵빵해지더군요. 왜 이렇게 넣을 것이 많은 걸까요?
“경숙이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대목에선 아차 싶었습니다. 제 가방 안엔 미움뿐만 아니라 질투, 원망, 심지어 누군가가 나보다 잘되는 걸 견디지 못하는 조그만 찌꺼기들까지 꽉꽉 눌러 담겨 있더군요. 제 마음속 짐들을 꺼내어 보니, 참으로 다양하고 희한한 것들 투성이었습니다.
어찌나 묵직한지, 도대체 이걸 들고 다녔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입니다. 제가 혹시 이사라도 준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래도 시인님 덕분에 마음의 짐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저도 시인님처럼 “돌덩이 같은 미움짐”부터 꺼내놓고 가볍게 손을 털었지요. 물론 몇 번이나 다시 가방 안으로 슬쩍 집어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이번에는 단호하게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신기하게도 가방 안이 한결 널찍해지고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비로소 사랑과 설렘, 기쁨 같은 가벼운 것들이 더 선명히 보이더군요.
그런데요, 시인님.
제 안에 남아 있는 “사랑”과 “기쁨”이라는 물건들이 생각보다 참 소소하더군요.
예를 들면, 주말에 동네 마트에서 떡볶이를 먹으며 느꼈던 행복감, 옆집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겨줄 때의 그 따뜻함 같은 것이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이것들 덕분에 제 마음의 가방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다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아직 가방 속 “설렘”은 뭔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게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요?
시인님 덕분에 저는 짐을 덜어내는 법을 배우고, 마음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가방의 지퍼가 터질 것 같던 제 삶에 한 줄기 해학과 위로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번 여행을 준비할 때는 가방 속에 꼭 시인님의 시집 한 권을 넣을 생각입니다. 읽을 때마다 가볍고 기쁜 발걸음으로 떠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늘 가볍고 설레는 날들 되시길 바라며,
한 독자가 씁니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