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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Nov 19. 2024

양평 5일장

김왕식









                양평 5일장






늦가을의 바람은 산들거리는 손길로 중년의 어깨를 어루만진다. 하늘은 한결 높아져 푸르른 빛을 띠고, 나뭇잎은 마지막 춤을 추며 땅으로 내려앉는다. 경기 서북부의 조용한 마을을 뒤로하고, 경의선의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 기차 안은 고요하고, 창밖의 풍경은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다. 황금빛 들판을 배경으로 한적한 산책로가 이어지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이 지나간다.
목적지는 동남부 양평의 조용한 시골마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운행나무와 양평 5일장이 그려지는 상상에 가슴이 설렌다.

양평에 내리자, 중년의 발길은 낯익은 곳을 찾아간다. 운행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우직하게 서 있다. 나무 아래 작은 평상에는 농사일로 손마디가 굵어진 노인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 소리는 바람에 실려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나무 옆 작은 선술집에서는 따끈한 막걸리와 전이 정겨운 냄새를 풍기고, 옛 친구와 함께 나누는 시간은 속세의 번잡함을 잊게 한다.
나무의 잎사귀는 절반이 떨어져 나갔지만, 남은 잎들은 햇살을 머금고 빛난다. 그 빛은 중년의 여유와 닮아 있다. 많은 것을 잃었지만, 남은 것이 더 소중해진 시간.

양평 5일장은 오랜만에 찾아온 이방인에게도 따뜻하다.
장터 입구에선 갓 튀겨낸 고소한 도넛 향이 유혹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계절의 맛이 가득하다. 탁자 위에는 곶감이 가지런히 놓여 있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밤이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붉은 고추와 윤기 흐르는 참기름 병이 나란히 자리 잡고, 수수한 얼굴의 아낙네가 정겨운 말투로 물건을 흥정한다. 그 옆에서는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솜사탕을 손에 쥐고 웃고 있다.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온기가 피어나는 소박한 무대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풍경에 온기를 더한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오후, 친구와 함께 장터를 거닐며 이런저런 추억을 이야기한다. 중년이 되니,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새삼 소중하다.
장터 한쪽에서 들리는 흥겨운 아코디언 소리는 지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흥겨운 장단에 맞춰 어깨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들뜨게 한다.
이 작은 풍경 속에 담긴 삶의 소소한 기쁨과 여유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잊고 지낸 중요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해가 서서히 기울며 장터는 조금씩 조용해진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상인들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보람이 교차한다. 중년의 여유로운 발걸음도 그들과 함께 장터를 떠난다. 다시 운행나무 아래에 서서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본다.
그 낙엽은 마치 중년의 나날처럼, 한때 푸르고 싱그러웠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아름다운 순간들로 남아 있음을 속삭인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노정이 아니었다. 일상에 쫓겨 잊고 지낸 느림과 소박함, 그리고 사람 사이의 온기를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다.
 양평의 가을은 그 모든 것을 담아 한 폭의 풍경처럼 펼쳐져 있었다. 중년의 망중한忙中閑은 이렇게 또 하나의 깊은 추억으로 마음에 자리 잡았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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