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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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審美)의 손끝에서 심성(心性)의 글로 ― 김운기 회장의 두 번째 항해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수원문협의 김운기 회장을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비유가 있다. 한 사람의 생애가 하나의 긴 강이라면, 그 강은 어느 순간 다른 물길을 만나 더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법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그 물길을 스스로 찾아낸 사람이다. 30여 년을 건축과 환경디자인의 세계에서 살며 형태와 공간을 다듬던 손끝이, 이제는 문장의 결을 만지고, 한문의 깊은 골짜기를 탐색하며 전혀 다른 강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세계는 본래 하나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질서를 발견하고, 의미를 구성하며, 삶의 구조를 설계한다’는 본질이 그의 두 직업을 관통한다.
서울대 디자인학부에서 환경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대우와 현대에서 국내·외 박람회, 그룹 홍보관, 기업관 등 굵직한 전시공간을 설계하며 ‘보이는 것 너머의 질서’를 탐독했다. SITRA’ 82 대우관, 시애틀 한국관, 전경련 현대그룹관, 풍산기업관 등에서 그는 형태의 논리를 구축했고, 용인 양지리조트와 사이판 월드리조트 설계에서는 풍경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을 모색했다.
이후 바피아노 뮌헨·서울·런던 매뉴얼 작업, 동대문 두타몰 인테리어 기획 등 세계 곳곳에서 그의 감각이 묻어났다. 그 모든 작업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명징하게 구조화하는 일’이었다.
그의 삶은 어느 순간 느리게 선회했다. 고된 시공 업무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려 들어간 헌책방에서, 그는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열었다. 고서와 고문서를 들여다보는 순간, 형태의 설계에서 의미의 설계로 넘어가는 조용한 전환이 일어났다. 30년 동안 쌓아 올린 고서 수집은 어느새 국내 최고 수준의 훈몽서 장서가로 그를 만들었다. 그 방대한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는 2012년 한문교육기관의 문을 두드렸고,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한문학 석·박사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강으로 나아갈 준비를 끝냈다. 제2의 직업은 충동이 아니라, 조용한 오랜 준비 끝에 얻은 필연이었다.
김운기 회장의 글쓰기에는 디자이너 시절의 감각이 그대로 배어 있다. 젊은 시절, <월간 디자인> 객원기자로 활동하며 배운 ‘사실에 근거한 서술의 단단함’, ‘독자가 가장 먼저 읽어야 할 핵심을 앞세우는 질서감’, ‘이미지처럼 보이는 문장의 구조’가 지금의 그의 문장을 견고하게 만든다.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질서를 드러내는 작업이고, 글쓰기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을 가시화하는 작업이다. 이 둘 사이를 왕복해 온 그의 문장은 형태의 질서를 잃지 않으면서도 정신의 깊이를 잃지 않는다.
그의 최근 저서, 《퇴계가 아들에게 쓴 편지》는 그가 왜 한문학자로 서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퇴계가 아들에게 남긴 531통의 편지를 완역해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사람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구조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위인화된 퇴계를 벗겨내고, 450년 전 한 아버지의 일상과 교육, 정성과 고민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이는 건축에서 ‘공간의 본래 쓰임을 복원하는 작업’과 닮아 있다. 김운기 회장은 텍스트라는 공간에서 인간의 본질을 다시 설계한 것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말한다. “직업은 삶의 선택이고, 삶을 사랑한다면 직업에도 열정을 쏟아야 한다.” 직업을 바꾸는 일은 삶의 물길을 바꾸는 대담한 선택이지만, 그 선택에는 명확한 필요와 단단한 뜻이 있어야 한다. 그는 그 뜻을 조용히 준비했고, 선명하게 밀어붙였으며, 결국 제2의 직업에서 제1의 직업만큼이나 깊은 세계를 구축했다.
지금 그는 한문학자로서의 길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첫 번째 직업이 ‘형태의 세계’를 설계했다면, 두 번째 직업은 ‘마음의 세계’를 탐구하는 일이다. 그는 그 세계를 향해 정밀한 도면을 그리듯 한 줄 한 줄 번역하고 연구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첫 번째 인생이 로켓의 1단이었다면, 지금의 삶은 궤도를 바꾸어 더 깊은 우주로 날아가는 2단 로켓이다.
수원문협 김운기 회장은 자신의 두 세계를 통해 말한다.
형태가 사람을 만들고, 글이 사람을 완성한다고.
그는 그 경계 위에서 두 세계를 잇는 다리처럼 서 있다.
조용하지만 견고하게, 아름다움과 진정성의 구조를 함께 세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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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물길이 만나는 자리에서
청람 김왕식
한 사람의 생애가
한 줄기 물길이라면
그대의 강은 오래전부터
두 개의 빛을 품고 흘렀다.
형태의 세계에서
공간은 그대 손끝의 숨을 따라
빛을 세우고
그림자를 다듬으며
사람이 머무는 자리를 조용히 열어 주었다.
어느 날,
헌책방의 먼지 속에서
천 년의 숨결을 만났고
한 줄의 고문서가
돌이켜야 할 또 하나의 강을
그대에게 속삭였다.
시간에 쌓인 글자들,
마른 장지 위의 가는 획들이
그대를 데려갔다.
형태에서 뜻으로,
설계도에서 문장의 심지로.
오래된 종이의 냄새는
세월의 강물을 가른
보이지 않는 뿌리의 향기였다.
그 향기를 따라
그대는 외로운 공부의 길로 걸어가
마침내 한문학의 깊은 골짜기에서
두 번째 물길을 찾았다.
퇴계의 편지 531통,
한 아버지의 생살 같은 마음이
그대의 번역 아래
숨결을 되찾고
빛처럼 다시 깨어났다.
사람의 삶은
하는 일의 모양이 아니라
뜻이 가리키는 방향에 의해 지어진다는 것,
그대는 두 개의 직업으로
하나의 진실을 증명했다.
첫 번째 강에서 그대는
형태로 세상을 세웠고,
두 번째 강에서는
뜻으로 사람의 마음을 세운다.
두 물길이 만나는 자리에
우리는 본다.
한 사람이 견고하게 다져온
정신의 도면,
한 생애가 끝내 흘러가려는
더 넓고 깊은 바다.
그대의 삶은
직업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이고,
하나의 구조는
결국 한 편의 시다.
지금 그대는
자신의 두 세계를 잇는 다리 위에 서서
조용히 말하고 있다.
뜻이 깊어지면
삶은 언제나
새로운 물길을 연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