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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무욕 그리고 만족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탐욕, 무욕 그리고 만족






탐욕은 언제나 ‘더’를 부른다.
손안에 무엇이 있든,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이든, 탐욕은 가진 것의 무게를 헤아리지 못하고 끝없이 다른 것을 요구한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지치고 흩어지는 순간은 결핍 때문이 아니라, 끝을 모르고 커지는 그 ‘욕망의 방향’ 때문이다. 사람은 한 시절을 살아내며 뒤늦게 깨닫는다. 탐욕은 대상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흔히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라고 여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 욕망의 불씨가 모두 꺼져버린 듯한 공백의 자리. 그러나 무욕은 마음의 빈자리를 비워놓는 것이지, 삶의 충만을 회복시키는 자리는 아니다. 마음이 전부 사라졌다고 해서 욕망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비어 있는 마음에도 욕망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욕망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숨어 움직인다.
그러므로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다. 탐욕을 이기는 힘은 ‘없음’이 아니라 ‘충만함’이다.
그 충만함의 한가운데에 만족이 있다.

만족은 가진 것의 수량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만족은 사유의 방향에서 태어난다.
어떤 이는 적게 가졌음에도 마음이 넉넉하고, 어떤 이는 많게 가졌음에도 마음이 허기져 있다.
만족은 외부의 양이 아니라 내부의 결(結)에 달려 있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손에 쥔 것의 크기를 따지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지탱하는 데 충분한가를 살핀다.
충분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바로 만족이다.

만족하는 마음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탐욕이 사람을 흐트러뜨리고 끝없는 비교로 몰아넣는다면, 만족은 사람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욕망이 향한 바깥의 잡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이 놓인 자리를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한다. 만족은 멈춤이 아니라 균형이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가라앉는 것이다.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제 마음 안에 조용한 무게를 내려놓는 행위이다.

만족은 또한 기억이다.
누군가와 함께 웃었던 저녁, 한 장의 빵을 나눴던 순간, 흐린 날씨에도 묵묵히 피어난 들꽃 하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모든 것이 얼마나 귀했는지를 사람은 깨닫는다. 만족은 그 깨달음이 마음의 습관이 된 상태다.
더 큰 것을 얻어야만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손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던 작은 것들이 삶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다.

만족은 고요한 마음의 형태다.
탐욕이 뜨거운 열이라면, 만족은 서늘한 물빛이다.
탐욕이 손을 밖으로 뻗게 만든다면, 만족은 손을 안으로 거두게 한다.
탐욕이 속도를 높인다면, 만족은 삶의 숨결을 느리게 한다.
만족하는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빼앗기지 않기 때문에 강하고, 자기를 잃지 않기 때문에 존귀하다.

결국 인간을 구하는 것은 ‘없애는 욕망’이 아니라 ‘맺히는 기쁨’이다.
만족은 조용한 기쁨의 형태이며, 그 기쁨을 오래 품을 때 사람은 탐욕에서 해방된다.
하여,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다.
탐욕의 반대는 지금의 삶을 충분히 아름답다고 여길 줄 아는 마음,
즉 만족이다.
만족하는 삶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마음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길어 올린 덕성의 빛이기 때문이다.

조용한 만족 하나가 한 사람의 생을 단단히 세운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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