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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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장벽이 아니고 마음이 장벽이다.
나이가 장벽이라는 말은 오래된 관성일 뿐인지 모른다. 몸은 해마다 조금씩 굽어 가도, 마음이 굽어야 비로소 벽이 생긴다. 숫자가 사람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속에 쌓아 올린 선입견이 삶의 반경을 좁힌다.
98세의 할아버지가 대학원 진학을 위해 책을 펼치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염려하고, 또 누군가는 “이 나이에 뭘” 하고 혀를 찬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조용히 연필을 깎고, 작은 돋보기를 챙겨 강의실에 앉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예전 같지 않을지 모른다. 대신 삶의 농도가 깊어져서, 한 줄을 읽어도 더 오래 곱씹고, 한 문장을 들여다봐도 그 안에서 자꾸 다른 얼굴의 인생을 발견한다. 이런 공부는 학위가 목적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끝까지 배우겠다는 태도, 오늘도 어제를 조금 넘어 보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졸업장이다.
100세의 할머니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말한다. “나도 젊은이하고 호흡하고 싶다.” 손가락은 조금 굳어 있지만, 눈빛은 여전히 장난기와 호기심을 잃지 않는다. 작은 화면 속에서 손주 얼굴이 나타나고, 손녀가 보내온 이모티콘이 반짝거리면, 그 순간 세대의 거리는 신기하게도 줄어든다. 버튼 하나 잘못 눌러 화면이 사라지면 “어머, 어디 갔지?” 하고 웃음이 터지고, 옆에서 누군가 다시 화면을 열어 주면, 그 웃음은 또 하나의 배움이 된다. 기술을 무서워하지 않고, 낯선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 이 마음이야말로 가장 젊은 근육이다.
도전은 거창한 목표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새로운 길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마다 조용히 시작된다. 오늘 처음 대중교통 노선도를 스스로 확인해 보는 일, 그동안 남에게 맡기던 은행 업무를 직접 해보는 일, 오랫동안 미루어 둔 악기를 다시 꺼내 보는 일도 모두 도전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다. 남보다 늦게 시작해도 괜찮다. 남들이 다 끝냈을 때 비로소 시작하는 공부도 있다. 세상의 시간표에 맞추지 않고, 자신의 호흡으로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또 다른 계절이 열린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이제는…”이라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린다. 이제는 늦었다, 이제는 힘들다, 이제는 아이들 앞길이나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 뒤에는 종종 “사실은 아직 하고 싶다”는 작은 속마음이 숨어 있다. 그 속마음에 조용히 손을 내미는 태도가 도전이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 문제이고, 우선 가슴속에서 오래 눌러 두었던 바람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의 시계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이를 핑계로 꿈을 접으면, 결국 나이가 사람을 넘어선다. 나이에게도 예의를 지키며 말할 수 있다. “그래, 너는 숫자로 남고, 삶은 계속 걸어가겠다.” 관절은 삐걱거릴 수 있지만, 생각은 여전히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수 있다. 몸은 이미 겨울로 향해도, 마음 안에서는 언제든 봄을 맞이할 수 있다.
문장이 떠오른다.
“나이는 몸에 쌓이고, 꿈은 마음에 쌓인다.
몸은 언젠가 멈추지만, 마음이 멈추는 날은 스스로 정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마을의 할아버지는 강의실을 향해 버스를 타고, 어느 골목의 할머니는 스마트폰 속 작은 세계를 배워 나간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누군가는 용기를 얻는다. 누군가의 도전은 그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옆 사람의 주름 사이에도 조용히 빛을 남긴다.
결국 장벽은 나이가 아니다.
과거에 스스로 걸어 잠근 마음의 문이다. 오래 잠가 두었다고 해서 다시 열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리면 된다.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는 그 순간, 서랍 속 깊이 넣어 두었던 문장 하나가 입 밖으로 나온다.
“지금 도전하다.”
도전은 어제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동사로 남을 때 가장 아름답다. 나이를 세는 대신, 오늘 새로 시작한 일을 세어 보는 하루라면, 백 살이 넘어서도 삶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