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이다, 조심하그라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빙판이다, 조심하그라




밤새 눈이 내렸다.
눈은 소리 없이 쌓였고, 길은 말없이 얼었다. 아침이 밝자 세상은 하얗게 드러났지만, 그 아래에는 미끄러짐이 숨어 있다. 겨울의 길은 늘 그렇다. 보기에는 고요하지만, 한 걸음만 방심해도 몸을 내던지게 만든다.
허리 굽은 아흔의 노모가 있다.

신 새벽,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아들을 떠올린다. 퇴직 후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느라 신새벽에 집을 나서는 아들이다. 환갑을 넘겼고, 손주가 둘이나 있지만, 노모의 마음속에서 아들은 여전히 어린애다. 눈 내린 길 위에 선 아이처럼, 넘어질까 봐 마음이 먼저 미끄러진다.

“빙판이다, 조심하그라.”

이 한마디에는 계절이 들어 있고, 세월이 들어 있으며, 무엇보다 한 생애가 들어 있다. 길조심하라는 말은 단순한 당부가 아니다. 그것은 ‘살아서 돌아오라’는 기도에 가깝다. 노모는 길의 상태를 말하지만, 사실은 삶의 조건을 말하고 있다. 세상은 늘 빙판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어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들은 이미 수많은 빙판을 건너왔다. 직장의 문턱, 퇴직의 시간, 가장으로서의 무게, 자식의 병원비와 학비, 그리고 노모의 병원 대기실. 그 모든 길을 건너왔지만, 노모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단 하나, 아직도 넘어질 수 있는 아들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식을 크게 보지 않는다. 외려 더 작게 본다. 세상은 커지고, 자식은 작아진다.

노모에게 시간은 직선이 아니다. 아들이 태어났던 날과 오늘 아침이 한 겹으로 포개진다. 그래서 환갑의 아들도, 손주가 둘인 가장도, 여전히 길에서 조심해야 할 아이로 남는다. 이것이 부모의 시간이다. 나이가 들어도 끝내 성숙해지지 않는 사랑, 계산을 배우지 못한 마음이다.

빙판길은 누구에게나 위험하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길을 걱정해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덜 미끄러진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안전장치는 손잡이나 미끄럼 방지 매트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이다.

노모의 당부는 아들의 발걸음을 직접 붙잡아 주지는 못하지만, 그의 몸에 한 겹의 온기를 덧입힌다. 그 온기는 넘어지지 않게 하는 힘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집을 나섰을 것이다. “알았어요”라는 말 한마디로, 그 긴 사랑을 접어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길 위에서 미끄러운 얼음을 밟는 순간, 그 말은 다시 떠오른다. 빙판보다 먼저, 노모의 목소리가 몸을 붙잡는다.

눈은 언젠가 녹고, 길은 다시 마른다. 그러나 부모의 당부는 계절과 상관없이 남는다. 그것은 삶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오래 버티는 말이다.
빙판이다, 조심하그라.
이 말은 길 위의 주의가 아니라, 사랑이 할 수 있는 가장 간결한 문장이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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