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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저 May 10. 2024

약사 선생님은 약 먹기가 싫어

저는 어려서부터 약 먹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어요. 맛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약을 맛으로 먹냐 하지만, 어린 시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맛을 내는지, 또 어떤 색을 내는지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콤달콤한 과자,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솜사탕, 또는 혓바닥을 빨갛게 파랗게 물들이는 사탕은 어린아이들에게 최고의 장난감입니다. 어릴 때에는 부모님들이 자극적인 음식을 함부로 아이에게 주지 않죠. 그렇게 달디 단 세상에 살다가 처음 맞닥뜨리는 약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한국은 현재 만 9세 이하의 아이에게는 가루약을 지어줍니다. 저도 어렸을 때 마찬가지였겠지요. 처음부터 알약을 먹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입니다. 가루약은 그 자체로도 쓰고 입 안에 오래 남아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그 가루약을 조금이라도 달게 만들어주려고 거기에 꿀을 섞어 숟가락으로 떠먹여 줬습니다. 딴에는 시럽처럼 달달하게 만들어 주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 꿀 때문에 입 안에 약이 진득이 남아 오랫동안 입 안에서 씁쓸하고 코 끝을 찌르는 인공적인 맛을 남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조금 더 크면 아이는 가루약에서 알약으로 넘어갑니다. 저도 약국에 오는 아이들에게 ‘땡땡이 알약 먹을 줄 아나요?”를 물어보는 편입니다. 아이가 알약을 먹을 줄 안다고 대답하면 호들갑스럽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어머! 정말요? 땡땡이 씩씩하네! 땡땡이 다 컸네요”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왜냐면, 저는 아직도 알약을 삼키지 못하거든요.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약사가 알약을 먹지 못한다는 말에 많이들 놀라고, 또 어이없어하기도 합니다. 아직도 알약을 씹어서 먹고, 캡슐제나 서방정처럼 원형 그대로 삼켜야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는 알약마저도 꼭꼭 씹어먹으니까요.


연하곤란이나 목구멍의 사이즈가 너무 작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심리적인 것 같아요. 어렸을 때 알약을 삼켜보려다 목에 걸려 토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일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 몸 어딘가 그때의 충격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알약을 삼키려고 하면 물만 꼴깍꼴깍 넘어가니 말입니다. 이제는 조금 나아져서, 정신을 아주 집중하면 작은 알약들은 넘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타이레놀, 훼스탈, 항생제처럼 조금만 사이즈가 커져도 삼키지를 못해 결국 씹어먹게 됩니다.


알약을 씹어먹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세요? 우선 너무 써요. 씹어먹게끔 만든 게 아니다 보니, 온갖 화학약품 냄새와 맛이 굉장히 이질적입니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씹어먹어야 하니 약 먹는 데에만 30분이 넘게 걸리고,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은 적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끝까지 다 먹어야 하는 항생제도 중간에 포기를 하게 됩니다. 약 먹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병원에 가도 약 처방 말고 주사를 놔달라 하고, 처방전을 받아도 약국에 들르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어제는 정말 심한 목감기에 걸렸습니다. 감기 정도로는 병원도 잘 가지 않는 제가 무려 2일 차에 병원에 갔으니까요. 가서 주사도 맞고, 약도 타왔습니다. 너무 아픈 나머지 공복에 항생제와 소염진통제들을 때려 넣었어요. 공복에 항생제를 먹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속 쓰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인후통과 몸살이 너무 심해서 속 쓰림은 별 거 아니라고 치부해버렸지요. 아주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약 먹은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속이 너무 울렁거리는 겁니다. 마치 숙취인 것처럼. 정말 말 그대로 과음한 것처럼 속이 메스껍고, 심장이 빨리 뛰고, 체온 조절이 안 돼서 얼굴이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를 반복했습니다. 결국 화장실에 가서 한 시간을 넘게 맨바닥에 앉아있었어요. 더러운 화장실 바닥은 신경 쓸 틈도 없었습니다. 약을 다 토해내고, 반차를 쓰고 집에 가서 두세 시간은 내리 잤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좀 괜찮아지더라고요. 공복에 항생제를 먹었으니 속이 좀 쓰리겠지, 생각한 거에 비해 너무나도 큰 대가였습니다.


이제 무서워서 어떻게 다시 약을 먹나, 하며 항생제를 빼고 나머지 소염진통제만 먹고 있습니다. 주사 덕분인지, 약 덕북인지 인후통과 몸살은 씻은 듯이 나았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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