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Fake it till you make it이라는 말도 있듯이, 원하는 것을 얻은 것처럼 행동하면 어느새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처럼. 내가 되고 싶은 사람, 본받고 싶은 롤모델이 있다면 그 사람을 따라 하라,라고 이야기한다. 그 사람의 사소한 습관부터 말투,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따라 하면, 어느새 나 또한 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너의 운명이 되기로 결심했다. 운명처럼 너에게 다가온 사람, 그게 내가 될 것이라고. 모든 것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운명처럼 거창한 이름이 붙은 것에는 더욱 그렇다. 낭만파인 너는 생각하겠지, ‘이 사람을 만나려고 그동안 방황 했나 보다. 나에게 딱 맞는 사람이 나타나긴 하는구나’ 하고.
순진한 너는 이 모든 우연을 가장한 만남들과 우리의 꼭 맞는 취향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지. 너의 작은 틈을 발견하고 그것을 메우고 있는 내 모습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서로의 마음을 읽은 것 같은 대화와 생각, 오래전부터 가지고 싶었던 것을 선물하고, 말하지도 않은 음식 취향을 맞추기까지. 너의 일상 곳곳에 나는 스며들 것이다. 그렇게 너의 모든 삶이 나로 가득 채워질 수 있게, 내가 혹여 떠나더라도 네가 슬퍼하고 괴로워함으로써 한 때 사랑이라 불렀던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말이다.
잔인한 상상이지만, 원래 사랑은 잔인하며, 그렇기에 더욱 매혹적인 것이다. 지금 당장 나는 나 스스로 눈을 가리지만 몸은 언제든 달아날 수 있게 반대편을 향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네가 즐겨 부르는 노래, 사무치도록 아프게 봤던 영화, 어렸을 적 가슴 깊이 남은 책, 애처로울 정도로 사랑하는 향수의 냄새. 그 모든 곳에는 내가 있다. 카페를 가도 우리는 늘 연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시키니 너는 커피를 마실 때도 내 생각이 날 거고, 편의점에서 레몬 맥주를 발견하면 내 생각이 나겠지. 영어 공부를 할 때에도,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를 봐도, 심지어 아파서 병원에 가고 약을 살 때에도 나를 떠올릴 게 될 거야.
우리는 늘 편안한 차림으로 서로의 동네에서 만났으니 동네 골목길 곳곳에도 서로의 추억이 가득할 거야. 서로의 동네로 발길이 닿을 때는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너무 아프겠지. 널 만날 수 있을까,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도 무서워하겠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단정한 옷차림과 잘 빗어 넘긴 머리를 하고 향할 것이다.
방 안 곳곳에서 내 물건이 하나씩 나올 때, 함께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던 세면대 앞에 혼자 서 있을 때, 곁에 아무도 없이 잠에서 깰 때, 현관문 비밀번호로 나의 전화번호를 외워버렸을 때.
그 모든 순간들에 내가 있다. 마치 운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