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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순금 Jun 28. 2023

바퀴전쟁기(2) - 분노

타슈켄트 생존기


바퀴벌레는 진화 중            - 김기택 -

 

믿을 수 없다. 저것들도 먼지와 수분으로 된 사람 같은 생물이란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멘트와 살충제 속에서만 살면서도 저렇게 비대해질 수 있단 말인가. 살덩이를 녹이는 살충제를 어떻게 가는 혈관으로 흘려보내며 딱딱하고 거친 시멘트를 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쇳덩이의 근육에서나 보이는 저 고감도의 민첩성과 기동력 앞에서는.

 

사람들이 최초로 시멘트를 만들어 집을 짓고 살기 전, 많은 벌레들을 씨까지 일시에 죽이는 독약을 만들어 뿌리기 전, 저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을까. 흙과 나무, 내와 강, 그 어디에 숨어서 흙이 시멘트가 되고 다시 집이 되기를, 물이 살충제가 되고 다시 먹이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빙하기, 그 세월의 두꺼운 얼음 속 어디에 수만 년 썩지 않을 금속의 씨를 감추어 가지고 있었을까.

 

로봇처럼, 정말로 철판을 온몸에 두른 벌레들이 나올지 몰라. 금속과 금속 사이를 뚫고 들어가 살면서 철판을 왕성하게 소화시키고 수억톤의 중금속 폐기물을 배설하면서 불쑥불쑥 자라는 잘 진화된 신형 바퀴벌레가 나올지 몰라. 보이지 않는 빙하기, 그 두껍고 차가운 강철의 살결 속에 씨를 감추어 둔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아직은 암회색 스모그가 그래도 맑고 희고, 폐수가 너무 깨끗한 까닭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움직이지 못하고 눈만 뜬 채 잠들어 있는지 몰라.





‘분노’ 단계에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내가 경험한 심리적 반응이 ‘분노’라는 감정 카테고리에 적합한지 검증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난관을 가장 INTP스러운 방식으로 해결하려면 심리학개론에 더하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저서 《On Death and Dying》까지 정독해야 할 것 같길래, 자아를 빠르게 외면하고 대충 썰이나 풀어 보기로 했다. (그래도 Kindle 위시리스트에 담아 놓음)


바퀴를 향한 활화산 같은 분노를 표출하기에는 몹시 애석하게도 나는 너무 쫄보였다. 바퀴 사진만 봐도 몸통이 쪼그라들고 소름이 돋는데 세상에 ‘놈들이 지금, 우리 집에, 돌아다닌다고?’ 나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 기능이 불가능했다.


바퀴를 발견했을 때의 이성적인 대처 방안은 이럴 것이다. 바퀴를 발견 → ‘아니 이 괘씸한 바퀴 새끼가 감히?’ → 즉각 살충제 구입 → 바퀴 박멸!! 하지만 나는 공포에 압도당해서 놈들이 바퀴임을 자각하고 나서도 곧바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신경을 마비시켜 벌레를 죽인다는 살충제가 내 중추신경에 작용한 것 같았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바퀴 공포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둠을 좋아하는 바퀴 놈들이 내가 온 집안을 소등할 때를 기다렸다가 지금 이 순간 부엌 여기저기를 기웃기웃 구경하고 다닐 걸 생각하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바퀴를 한 마리 발견하면 안 보이는 놈들이 수십, 수백 마리가 있는 거라던데? 내가 지금까지 발견한 바퀴들이 다 다른 개체라고 하면 벌써 눈으로 본 것만 다섯 마리인데 그럼 우리 집에 바퀴가 오백 마리는 산다는 뜻일까?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채 1시간을 누워있지 못하고 수시로 부엌을 확인하러 갔다. 머릿속에서 공포와 결합하여 점점 더 무시무시해지는 바퀴월드를 상상하는 것보단 차라리 몸을 일으켜 직접 놈들을 대면하고 오는 게 나았다.


바퀴가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새벽 시간에 좀도둑처럼 살며시 부엌 문을 열어 기어코 한두 마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는 몸서리를 치며 방으로 돌아와 바퀴 꿈을 꾸며 선잠을 잤다.





다시 분노라는 감정에 초점을 맞춰 그 때 나의 상태를 돌아보면, 바퀴벌레한테 화를 내기엔 너무 쫄보인 데다 룸메도, 친구도 없다 보니 건강하게 외부로 분출되지 못하고 안으로 좀먹으면서 신체 기능에만 집중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주었던 게 아닐까 싶다.

주된 증상은 불면, 지속적 긴장과 불안, 가던 길도 돌아보게 만드는 ㅡ미모였으면 좋겠지만ㅡ 흙빛 얼굴, 퀭한 눈빛, 썩은 표정 3종 세트. 이것도 분노의 한 형태인지는 심리학 책을 읽어봐야만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공포와 불면에 시달리던 밤, 우연히 그 놈을 보았다. 놈이 특별하다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크기가 흑미 한 톨 만한 다른 바퀴에 비해 이놈은 족히 2cm는 되어 보였다. 시력도 안 좋고, 무엇보다 쫄보라 가까이서 관찰은 못 하고 1미터 이상 멀찍이 서서 대충 판단했기 때문에 사실 그게 바퀴였는지 귀뚜라미였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정황상 어쨌든 놈은 우리 집 주방 어느 으슥한 구석에 깃발을 꽂고 새 바퀴제국을 개척하신 태조 바퀴였던 것 같다.


다행히 내가 아주 조용히, 발소리를 죽이고 쥐새끼처럼 부엌에 들어갔기 때문에 놈은 놀라 도망가지 않았다. 아마 내가 불을 켜긴 했으니 약간 경계 태세로 멈춰 있었던 것 같다. 쫄보로서 저놈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가장 나 스스로 심리적 데미지가 적을지 빠르게 판단하고는, 또다시 발소리를 죽이고 쥐새끼처럼 청소기를 가져와 조용히, 순식간에, 놈을 빨아들였다.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엘지 청소기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에서는 먼지통이 투명한 엘지 코드제로, 삼성 제트만 쓰다가 우즈벡 와서 그 옛날 엘지 동그린지 동글인지 하는 청소기만도 못한 구닥다리를 쓰느라 매일 불만이었는데, 이 날만큼은 수 개월 먼지통 비울 걱정 없고 심지어 내용물 볼 일 없이 불투명한(!) 고물 청소기가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광기 어린 생명력으로 콘크리트도 씹어 먹게 진화할지 모른다는데 바퀴에게 고작 청소기 따위야 대수겠는가 싶어 안에서 절대 기어 나오지 못하도록 주둥이를 휴지로 꼼꼼히 쑤셔 막았다. 빛도 산소도 다 차단해 주겠어. 너의 왕국은 여기서 끝이다.


그제서야 약간 제정신이 돌아왔던 듯하다. 새벽에 당장 컴퓨터를 켜고 우즈벡 최고의 온라인 쇼핑몰 ‘우줌마켓’에서 바퀴벌레 약을 검색했다. 바퀴벌레는 우즈벡 말로는 수바락, 러시아어로는 따랄깐. (하지만 우즈벡어로 검색하면 성능과 효과가 못미더운 우즈벡 제품이 나올 것 같아 따랄깐으로 검색했다.) 오, 그런데 바퀴 제품 1위가 미국 약이었다! 러시아어로 쓰인 상세 설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영어로 된 제품 포장지 사진만 봤는데도 벌써 바이든이 내 편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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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만 더 버티면 원군이 온다. 그것도 미군이!!

하나님 부처님 천지신명과 알라신이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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