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슈켄트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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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은 우즈벡 사람들이 말하는 '40일 불볕더위'의 한가운데 있다. 마침 내가 부하라 구경을 다녀와야지 마음먹은 이번 사흘은 그중에서도 가장 뜨겁다. 오늘 부하라의 최고 기온은 43도, 내일은 44도라고 되어 있다. 선크림 두 개와 햇빛 막아줄 우산 챙기고, 각오하고 출발했다.
여자 혼자 여행객으로서 타슈켄트에서 부하라까지 가는 안전한 방법은 비행기 아니면 기차 둘 중 하나다. 자차가 있다고 해도 추천하지 않는다. 우즈벡은 아직 제대로 된 도시 간 고속도로가 없다고 한다. 길이야 있지만 속도 내서 운전하기에 쾌적한 도로는 아니라고. 나라가 이 정도 규모가 되었는데도 고속도로가 없는 건 좀 의아하다. 여긴 박씨 성을 가진 대통령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혹자는 ‘수도 몰아주기’가 중앙아시아 국가들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고도 했다. 나름의 이유야 있겠지만 이제는 좀 고속도로가 필요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어쨌든 다시 비행기 또는 기차 얘기로 돌아와서, 비행기는 우즈벡 항공으로 딱 1시간 비행에 왕복 10만 원 정도, 기차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아프로시얍(Afrosiyob) 고속열차를 타야 한다. 우리나라 KTX 정도 생각하면 되는데 부하라까지 3시간 50분, 가격은 편도 1만 9천원이다(구매 일자에 따라 다를 수 있음). 승무원이 간식도 주고 커피, 물도 준다. 우즈벡에서 했던 몇 안 되는 만족스러운 경험이다.
아프리칸(African)이라는 다른 고속열차도 있는데 시간은 똑같이 걸리고 더 비싸다. 한 2만 5천 원쯤 하는 것 같다. 더 저렴한 다른 기차도 있기는 하지만 탔다 하면 찐 꼬리칸 체험이라 양심이 살아있는 한 절대 추천할 수 없다. 나는 코칸트랑 사마르칸트 여행 때 이미 경험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마.
* 혹시 궁금할 사람들을 위한 정보 제공 차원에서 몇 마디 덧붙이면 (독자도 몇 없는 글에 무슨 쓸데없는 짓인지 모르겠다) 대략 6~7시간 걸리고 가격은 편도 1만원대 초반, 침대 기차인 경우가 많고 제일 중요한 건 에어컨 안 틀어준다는 것. 상상해 보세요, 40도 더위에 에어컨 없이 7시간…?
내가 부하라행 아프로시얍 표를 끊은 건 대략 한 달 반 전인 6월 초다. 아프로시얍 티켓 구하기는 콘서트 티켓 사는 것만큼 어려워서, 내가 원하는 날짜는 이미 여행사에서 다 사재기해서 매진이고, 운 좋게 가는 표가 있으면 오는 표가 없고 그렇다. 그러다 특정 시간에 갑자기 표가 풀리곤 하는데, 나는 새벽 2시쯤 자다 깨서 혹시? 하고 들어가 봤다가 타이밍 좋게 풀린 티켓을 구했다. 지루한 눈치 게임이 싫은 사람은 여행사 가서 웃돈 주고 사거나, 기차역 직원을 매수하면 된다고 한다. 우즈벡에서 오래 사신 분들 중에는 얼굴 알고 지내는 기차역 직원 찬스로 표를 구하시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그저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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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드디어 당일 아침.
내가 지내는 곳은 기차역과 차로 10분 정도 걸린다. 아침 8시 59분 기차여서 8시 반에 얀덱스 택시를 불렀다.
* 얀덱스 택시는 차와 기사 등급에 따라 클래스가 나뉘는데, 가장 저렴한 스타트부터 합리적인 컴포트, 좀 간지나는 비즈니스 정도가 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은 컴포트 택시를 부른다. 스타트와 겨우 몇백 원 차이인데 만족도가 꽤 차이가 난다. 운전 스킬이나 고객 응대, 에어컨 켜주냐 안 켜주냐 등. 하지만 나는 그 몇백 원이 괜히, 진짜 괜히 아까워서 스타트를 주로 부르고, 종종 오늘 같은 사단이 난다.
일단 택시가 우리 집까지 오는 경로를 핸드폰으로 지켜보면 대번에 느낌이 온다. 뭔가 쎄-한 느낌. 지름길을 쏙쏙 잘 골라서 빨리 오는 기사가 있는 반면, 오는 길부터 시원찮은 기사도 꽤 많다.우즈벡이 그렇게 바쁘게 사는 나라가 아니다 보니 나는 평소 시원찮은 느낌이 들어도 그냥 좀 천천히 가고 말지 하면서 잘 타고 다녔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오늘 기사는 후자였는데 거기다 빌런이었다. 스타트 택시는 대부분 셰보레 스파크가 오지만 간혹 마티즈도 있다. 마티즈라니, 그게 택시라니. 오늘 택시도 마티즈였다. 경험상 마티즈들은 에어컨도 잘 안 튼다. 그래도 상관없다. 택시 타는 시간 기껏해야 10분 좀 더우면 그만이다.
안타깝게도 8시 반에 부른 택시가 바보 같은 길을 골라 돌아서 온 바람에 꽤 시간이 촉박해졌다. 그래도 아직 늦지 않게 갈 수는 있어. 급한 마음에 캐리어 짐을 뒷좌석에 싣는데 바퀴가 시트에 닿았다. 앗, 실례. 자리 앉아서 가방 눕히려고 일단 헐레벌떡 탔는데 기사가 몹시 싫어하는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그래, 알아요. 미안해요. 하지만 급하니까 좀 가요.
기사가 갈 생각을 안 한다. 날 째려보는데 딱 사춘기 일찍 온 초딩 여자애가 옆눈으로 흘겨보는 그 표정(!)이었다. 성인 남성 택시 기사한테서 그런 눈빛을 받아 보다니…. 너무 오랜만에 보는 유치짬뽕한 표정이라 적잖이 황당했지만 나는 급했고, 빨리 역에 가야만 했다.
- 븨스트라, 븨스트라. (빨리, 빨리)
- (도리도리) 뭐라 뭐라 하지만 못 알아들음. 야 녜 예두(나 안 가).
- 손목시계 가리키며 한국말로, 아, 가달라고요. 빨리요. 늦는다고요.
- 니옛 니옛. 야 녜 예두. (노노, 나 안 가.) 차를 파킹하면서 시동을 끈다.
- (다급한 나. 지갑에서 돈을 꺼냄) 돈 더 줄테니까 가자고요. 븨스트라! 빠좌-알스타!(부탁할 때 쓰는 플리즈 같은 러시아말)
러시아어랑 우즈벡어로 뭐라 뭐라 하면서 자기 이미 콜 취소했다고 안 간다고 지랄. 옷에 뭐 묻었다고 학교 안 간다 생떼 쓰는 초딩이 따로 없었다.
나는 뚜껑이 열렸다. 아, 급해 죽겠는데 뭐 하는 xx놈이야, 돈 더 준대도 안 가. 정신 나간 xx 아니야. 후회 없이 성심성의껏 언어폭력을 행사하고 새 택시를 불렀다. 내리면서 마티즈 문 부서지라고 쾅!!!! 닫았다. 더 세게 닫을 걸, 너의 소오중한 마티즈.
천만다행으로 새 택시가 바로 인근에 있어서 곧바로 갈아탔다. 새 택시 기사는 영문도 모르고 나의 “이지쩨 븨스트라!!! 빠좌-알스타!!!(빨리 가주세요! 플리즈!를 의미하는 막되어먹은 러시아어)” 채찍을 맞으며 기차역까지 눈썹이 휘날리게 질주했다. 59분 기차 출발에 55분에 간신히 도착. 내리면서 “쓰빠씨-바 발쑈에, 다스븨다-니아!(정말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를 외치고 뛰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하로셰바 드니?)도 하고 싶었지만, 러시아어가 그렇게까지 유창하진 않아서 맘속으로만. 상식 밖의 일만 안 당하면 나도 원래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란 말야, 이 우즈벡 인간들아.
외국인 여자애가 짐을 들고 다급하게 뛰어오니 누가 봐도 아프로시얍 타고 여행 갈 사람 같았는지, 역무원들이 자동으로 아프로시얍? 쁘리야마(쭉 가)! 해줬다. 덕분에 최단 거리로 기차 앞까지 도달하고, 출발 1분 전에 승차에 성공했다.
이 더운 날에 아침부터 생쇼를 하고 간신히 기차에 타서는 얀덱스 고객센터에 항의 메시지를 썼다. The driver is mad. 내 가방이 더럽다면서 운전 안 한다고 버텼다고. 그리고 가방 사진도 보내주면서, 진흙 묻은 것도, 물 묻힌 것도 아닌데 상식적으로 이게 승차 거부할 만큼 더럽냐. 이 택시 기사한테 패널티를 주고 나의 피해도 보상하라,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 마구 메시지를 써서 보냈더니 고객센터에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2백 원 할인 쿠폰을 줬다. 그래, 택시비 비싸면 2천 원 나오는 나라에서 10% 할인 쿠폰 준 거니까 고오맙게 받을게.
유치한 택시 기사 새끼, 너어는 그 차에서 방귀도 뀌지 마라. 아니 이 먼지투성이 황토색 나라에서, 흙먼지 조금에 그렇게 더럽다고 지랄할 거면 도대체 택시는 왜 하는 거냐? 발작하는 거 보면 차가 제네시스라도 되는 줄. 게다가 네 마티즈 첨부터 눈에 띄게 깨끗하지도 않더만. 소오중한 마티즈, 죽을 때까지 평-생 타고 다니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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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시얍 열차는 사마르칸트, 나보이를 거쳐 부하라에 멈췄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역 놓치지 않으려고 꾸벅꾸벅 졸면서도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다 와서 생각해 보니 부하라가 종점이었다. 보드카를 처먹고 잤어도 어차피 승무원들이 깨워줬을 것을.
부하라는 얀덱스 택시를 잡을 수 있는 도시라 택시 요금 바가지를 면할 수 있다. 나오면서 얀덱스를 잡았는데 호텔까지 스타트는 2천 원, 컴포트는 2천 5백 원 정도 찍혔다. 근데 7분이나 기다려야 했기 땜에 그냥 취소하고 호객하던 택시 아저씨랑 흥정해서 대략 2천 8백 원에 호텔까지 왔다.
아침 8시 반에 집에서 나와서 머큐어?(Mercure) 호텔 로비까지 딱 도착하니 오후 한 시 반. 다섯 시간의 여정이 왜 이렇게 열다섯 시간 같은지. 예쁜 호텔 인테리어와 쾌적한 에어컨에 기분이 살살 풀린다. 그래도 내가 간만에 여행을 왔구나!
어머 세상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와이파이 비번을 먼저 알려주는 로비 아저씨에게 고마움의 미소도 지어 드렸다. 또 한 번 다가오는 파이팅을 모르는 채.
체크인을 하고 나니 1시 40분 정도 됐다. 방에 올라가도 되냐고 물으니 아, 잠시만 미안하다고 뭔가를 확인해 보더니, 원래 두 시부터 체크인이니까 두 시까지만 기다려 달란다. 흔쾌히 알았다고 하고 로비에서 소소한 일처리를 하며 기다렸다.
두 시가 돼서 다시 리셉션에 갔는데 아, 미안하단다. 방이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아서 한 삼십 분만 더 기다려 달라는 거다. 슬슬 기분이 나빴다. 내가 이례적으로 일찍 온 것도 아닌데 정식 체크인 시각에도 방 준비가 안 끝났어? 그리고 30분 기다려 달라는 건 청소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거 아닌가?
- 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방 준비는 다 돼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죄송합니다. 그 방 쓰던 숙박객이 늦은 체크아웃을 하는 바람에 청소가 늦었어요.
- 그럼 다른 방을 준비해놓으셨어야죠.
- 그 방이 그거 하나 남아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뭐래. 이런 상황이 오면 일반적으로 다른 호텔에서는 방을 업그레이드해서라도 손님이 제때 체크인을 못 하게 되는 상황을 막는다. 그것이 호텔업의 룰.
내가 표정이 썩어가는 걸 보자 리셉션 직원이 다시 물었다.
- 당신이 원하면 방을 업그레이드해드릴 수 있어요. 큰 차이는 없는데 그렇게 하실래요?
-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하고 새로운 방 설명을 들었다. 근데 직원이 차액 70불을 내라는 거다. 네 생각에는 10만 원 가까이 되는 이 돈이 큰 차이가 없는 돈이니? 우즈벡 노동자 평균 임금의 1/5이 넘는 이 돈이? 어이가 없었지만 이 말은 밖으로 내뱉지 않았고, 우선 중요한 건 내가 왜 이 돈을 내야 하냐는 거였다.
- 당신들이 방을 늦게 준비해서 업그레이드하는 건데 나보고 돈을 더 내라고요?
- 당신이 원하면 업그레이드해드릴 수 있다고… 근데 원한다고 하셔서….
- 이건 전혀 납득이 될 만한 옵션이 아닌데요.
- 죄송합니다. 그럼 음료 서비스라도 제공해 드릴게요.
- 무슨 음료 있는지 메뉴 좀 줘보세요. 그럼.
옆에 있던 얼빠진 남자 직원이 한참동안 부스럭대며 메뉴를 찾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고객 응대에 어이가 없고, 이미 아침에 한바탕하고 왔는데 여기서도 삐걱거리니 답답해서 또 화가 나고, 이 더운 날 몇 시간 이동에 벌써 지칠 대로 지쳤고, 메뉴판 하나 찾지도 못하는 멍청함을 보고 나니 우즈벡 인간들에 대한 1년치 해묵은 분노가 차올라 리셉션에다 대놓고 짜증을 내고 소파에 와서 팔짱 끼고 앉았다.
한 10분 넘게 지났나, 아까 그 직원이 눈치 보며 와서는 방을 무료로 업그레이드해 주겠다고 한다. 여태도 내 방 청소가 안 끝났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지만 여하간 업그레이드를 해준다니 알았다 하고 올라갔다.
- 나는, 이렇게 해서, 홀로여행 인생 처음으로 베드룸과 거실이 따로 있는 스위트룸에서 2박3일을 묵어보게 되었다. -
방은 휑하다 싶을 만큼 넓다. 화가 나면 앞구르기를 한다는 에버랜드 푸바오처럼 나도 화났으니까 이쪽저쪽 앞구르기 해서 다니라는 뜻인가. 그래도 호텔에서 이 정도 노력했으면 용서해줘야지.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하라 여행, 내일은 제발 미간 펴고 다닐 수 있기를. 빠좌-알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