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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윤희 Apr 01. 2024

교포 교사가 버려야 할 것

셋. 직장과 집이라는 두 마리 토끼

 어쩌면 이번 주제가 이 글의 제일 첫째항을 차지했어야 했습니다. 하필 글 쓰는 날에 성과 상여금이 들어와 주제가 잠시 밀려났습니다. 교포 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나와야 할 내용이 아닐까 합니다. 이 길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두 마리 토끼였습니다. 가정을 지킬 것인가, 직장에서 내 자리를 지킬 것인가? 여기에 대한 답을 가정으로 선택하는 순간 자동으로 교포가 된 것 같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어디까지나 제 이야기일 뿐, 교직 사회 전부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아이도 잘 키우시고 승진도 잘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울트라 슈퍼맘을 제외하고 어디까지나 두 가지를 동시에 못하는 저 같은 사람의 이야기라고 들어주십시오. 결혼생각이 없이 서른을 넘겨가던 저는 뒤늦게 만난 아래층 총각선생님과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혼자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의 영역을 넓혀가던 5년 차 교사에게 총각선생님의 플러팅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내 생에 결혼은 없다고 생각한 저에게도 인생의 반쪽이 찾아왔거든요. 그렇게 결혼을 하고 첫째를 낳았습니다. 고마운 친정언니 덕분에 마음 놓고 아이를 맡기고 저는 또 열심히 제 일을 했습니다. 둘째를 낳고 휴직을 하려고 육아휴직도 아껴 놓았습니다. 그러다 둘째를 낳고 아껴둔 육아휴직을 2년 썼습니다. 내 인생에 육아휴직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두 아이를 키우다 2년 후 복직을 준비했습니다.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나만은 예외일 것이다 생각한 제가 우습게도 셋째가 생겼습니다. 계획에 없던 다자녀 가정이 되고 저의 휴직은 3년 더 늘어났습니다. 극 소심한 내향형 엄마를 닮아 셋다 모두 I였던 우리 아이들은 누구 하나 엄마를 떨어지지 못해서 기관에도 못 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5년을 집에서 오롯이 세 아이를 키웠습니다. 육아를 도와줄 친정도 시댁도 없어 오롯이 저와 남편 둘이서 고군분투한 5년이었습니다. 


 복직을 계획하고 가장 걱정되는 것이 아이들이었습니다. 이 세 아이를 아침부터 어떻게 준비시켜 출근을 할 것인가가 관건이었습니다. 교직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자녀를 데리고 출근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근처 병설유치원이 있는 학교로 내신을 냈습니다. 혹시나 떨어질까 봐 두세 곳의 병설을 알아보고 유일하게 다자녀 무추첨 입학이 되는 학교로 등록했습니다. 운 좋게도 다급지 시골학교로 저도 전보발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복직 후 5년은 아이들과 저의 끝없는 도전기였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저는 학교 수업과 업무만으로도 일이 벅찼습니다. 거기서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없을 만큼 출근과 퇴근, 퇴근 후 저녁시간 가족을 돌보기만으로 여력이 없었습니다. 아이들 씻기고 재우면 저도 곯아떨어지기 바빴습니다. 내 시간을 가질 여유도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퇴근까지 작은 경차 안에서 우리 넷은 항상 똘똘 뭉쳐 다녔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승진도 점수도 꿈꿀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 반 수업 하나 최선을 다하는 것도 충분한 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작은 학교 5년을 지나 또 옆마을 작은 학교로 옮겨왔습니다. 학년에 학급이 한, 두 개의 반이니 오롯이 학년의 업무를 다 맡아야 합니다. 규모가 작은 학교만 다니다 보니 부장을 할 겨를 도 없었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교직생활 20년이 넘어서는 동안 저는 부장경력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창 일할 때 휴직을 해 버렸으니 제 경력의 허리 부분은 골다공증 걸린 뼈처럼 비었습니다. 고맙게도 국가에서 셋째 이상의 다자녀 휴직기간은 경력인정을 해 주어 겨우 부러지지 않게 채워졌지만 실은 텅 빈 공간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학교만 전전하다 보니 경력란에 부장경력은 항상 0이 되었습니다. 올해는 업무 신청서를 쓰는데 좀 부끄럽더라고요. 일하기 싫어 안 한 것은 아닌데 경력만 두고 보면 참 놀고먹는 사람 같아 보일까 부끄럽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저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능력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내가 승진을 포기하고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아이들이 내 삶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의 승진보다는 나 하나 믿고 이 세상에 내려온 이 아이들의 하루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리 토끼를 미련 가득한 눈으로 보내주었습니다. 떠나보낼 때 조금은 허무하고 아쉽고 미련이 남았지만 이제는 제 마음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쿨하게 이제는 보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아이들 시집, 장가보낼 때 이왕이면 신랑 신부 부모가 교장, 교감이라더라 하는 말을 듣게 해주고 싶었지만 일단 저는 실패입니다. 남편이라도 잘해봐야 할 형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부모자리 보고 오겠습니까. 사돈 되실 분들이 저희 경력 보고 오시겠습니까. 샛 중 시집, 장가 안 가겠다고 할 녀석도 하나쯤은 있지 않겠나 생각하면 까짓 거 교장, 교감 시어머니, 장모님 아니라도 좀 어떻습니까. 최선을 다해 마음씨 고운 어른으로 늙어있겠습니다. 


 저는 토끼 같은 자식 셋이면 충분합니다. 한 마리쯤 보내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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