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비행일기_중국 베이징
최근에 다녀온 중국 베이징 비행. 감사하게도 모든 크루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비행이었다. 오랜만에 해당 비행에 승무원 부부도 있었는데, '끼리끼리 만난다'라는 말이 맞듯, 부부가 정말 따듯하고 좋은 선배들이었다. 막내인 나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어 감사했다.
포근한 보살핌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정말 승무원으로서 대단하다고 느끼며 깊은 존경을 표하게 만든 건, 바로 남편인 선배였다. 그의 이름을 편하게 가칭으로 '마크'라고 하겠다. 마크는 8여 년을 일한 선배였으며, 곧 몇 달 뒤에 승진이 될 예정이었다. 왜 그가 승진이 될 예정인지는 일을 하면서 여실하게 느꼈다. 철저한 준비성과 다른 크루들을 최고로 배려하기 위해 그만의 방법으로 세팅한 갤리, 승객들을 응대하는 프로페셔널한 모습,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친화력... 그야말로 태생이 승무원이로구나 싶었다. 그를 향해 벌써 이번 중국 비행까지 4번이나 함께 비행하게 된 남자 크루와 함께 우리는 존경을 표하며 세상에 저렇게 대단하고 완벽한 사람은 처음 봤다며 서로 혀를 내둘렀다. 일도 잘해, 말도 잘해, 재밌기까지 해, 사람 인성 좋아, 아내에게 다정해... 그런 그의 아내에게 나는 조용히 가서 말했다. "네 남편 진짜 대단해... 사람 자체가 승무원이야." 그러자 아내가 웃으면서 고맙다며 은근히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역시 결혼은 저런 사람이랑 해야 하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이어트 중이라면서 집에서 손수 챙겨 온 예쁘게 잘라온 삶은 계란과 다진 아보카도가 담긴 도시락통을 열었다. 그러면서 기내에 실린, 서비스가 다 끝나고 남은 바삭바삭한 크루아상에 직접 칼 질을 해서 예쁘게 아보카도와 삶은 계란들을 넣어서 크루아상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새벽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브리핑룸에 도착했는데,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서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손수 준비한 건지 참 대단했다. 그렇게 만든 샌드위치들을 그는 동료들에게 먹으라면서 건넸고, 나에게 역시 그는 하나 만들어주었다. 그와 한 팀이 되어 함께 일을 했는데, 정말 많은 것들을 도와주어서 감사했다. 감사한 와중에 그는 나에게 샌드위치를 주면서 자리에 앉으라며 내 의자 맞은편에 마찬가지로 함께 앉았다.
그는 일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물어봤다. 딱히 어려운 점은 없지만, 간혹 헷갈리는 것들이 있어 이것저것 그에게 물어봤다. 그는 차분하면서도 정말 백과사전급으로 거침없이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내게 조언을 건넸다.
"내가 너한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어쩌면 이게 너의 단점이거든. 바로 '쉴 때 쉬지 않는다'는 거야. 너는 정말 열심히 일해. 하드 워커야. 근데 나는 그게 너무 걱정되는 게 뭐냐면 너 그러다가 쉽게 혼자 지친다는 거야. 제발 그러지 마. 쉴 때 쉬는 것도 Time management, 즉 시간 관리야. 나랑 예전에 함께 비행한 한국인 크루가 있었어. 지금 걔 그만뒀거든. 근데 너를 보면 그 여자애가 생각나. 그 여자애가 너처럼 정말 쉬지도 않고 일했어. 그러다 보니 혼자 지치는 거야. 마음도, 몸도. 남들 눈에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좋은 거고 분명 칭찬이야. 다른 크루들도 고마워할 거야. 근데 스스로에게 왜 보상할 시간을 안 주는 거야? 쉴 때 쉬어. 진짜 중요해. 정말 내 말을 믿어. 나는 그때 그 여자애를 보고 느꼈어. 아, 저렇게 일하다가 걔도 얼마 안 가서 그만두겠구나. 근데 진짜 그러더라고. 아마 너는 외국인이라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겠지만, 그 시기를 앞당기느냐 좀 더 두느냐는 너의 개인적인 미래 계획에 달려있긴 하겠다만 나는 이렇게 일하는 너의 습관과 시간 관리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고 봐. 너는 여우같이 일하는 것도 필요해. "
그의 말을 듣고서는 순간 아차 싶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눈치와 면박을 주면서 일하라고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내 성향 상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나가는 것이 편해서 서비스가 끝나고도 일을 했다. 사실 나도 사람인지라 그러고 싶지 않은 날도 많았는데, 그냥 나 스스로 눈치 보여서 그렇게 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고 돌아보았다. 맞다. 쉴 때 쉬지 않고, 남들 먹을 때 밥도 안 먹었기에 스스로 금방 지치고 피로해지고 쉬는 날이 쉬는 날 같지가 않았다. 쉬는 날에도 더 쉬는 날이 많았으면 바랐고, 같은 동기들에 비해 비행에 흥미가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 이유가 그가 말한 나의 단점, '쉴 때 쉬지 않는다.'라며 나에게 주는 보상 시간 관리가 부족해서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쉴 때 쉬는 것도 중요하지. 왜 나는 열심히 일한 나 자신에게 보상을 안 해주고, 오히려 스스로 눈칫밥을 만들어서 몸을 혹사시킨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반성했다. 그런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그가 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다. 따듯한 선배인 그는 다른 음료도 내게 권하며 절대 다 먹을 때까지 일어나지 말라고, 걱정하지 말고 나머지 일이 생기면 내가 할 테니 천천히 먹으라고 말했다. 절대 다른 선배들 눈치 보지 말라면서 말이다.
어쩌면, 내가 하는 행동들이 전형적인 한국인 시니어 리티가 깃든 사회에 길들여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내 성향이 그런지라 인생을 항상 정직하고 우직하니, 어쩌면 멍청하게 살아온 나이기에 그런 거라 생각한다. 살면서 가끔은 여우처럼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걸 실천해 본 적은 없던 것 같다. 아직도 인생을 노련미가 아닌 정직함으로 승부를 보려는 내 고지식한 면 때문일지도?
앞으로 다음 비행부터 그의 조언을 되새김질하면서 쉴 때는 쉬고 내 몸에 비행 중간중간 보상을 주려고 한다. 당장 내 고지식한 몸뚱어리와 생각에 변화를 주기란 어렵겠지만 말이다. 앞으로는 여우같이 일하는 승무원이 돼보자. 플리즈 콜미 팍스 크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