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직업일기
승무원이 된 후 생겨버린 나쁜 습관이 있다. 그건 바로
비행만 끝나면 매운 것이 미친 듯이 당겨 라면을 습관적으로 자주 먹게 된 것
이다. 맵찔이인 내가 매운 음식에 대한 미학(?)을 배워가는 중인 이 습관은, 이제 막 비행을 시작한 햇병아리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꽤나 시니어가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이 습관은 고쳐지기는커녕 더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고된 비행 노동을 마친 뒤 매운 것이 당기는 게 뭐 그리 나쁜 것이냐고 바라볼 수 있다. 그렇다. 태생이 한국인 인지라 몸이 피곤하거나 아프면 뜨끈한 국물이 저절로 생각나고 매콤한 것들이 생각나는 것은 절대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라면'에 있다. 집에 도착해서 냉장고며 음식 창고를 뒤지기 시작한다. '매운 것이 당긴다'는 생각에 지배된 나의 몸뚱이는, 매의 눈으로 내가 갖고 있는 음식들 중에서 매운 음식을 찾는다. 그러면 바로 1순위로 시선이 꽂히는 것이 '라면'이다. 다른 것들을 찾아보려고 해도 이미 손은 어떤 라면을 먹을까라며 라면 봉지들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다. 그렇게 라면을 정해놓고 다양한 사람들과 기내로부터 뭍은 먼지들과 고생들을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서 씻겨내려 버린다. 그런 뒤 바로 끓이게 되는 라면. 라면을 먹으면서 내가 하는 생각은 '그래, 이 맛에 열심히 일하고 퇴근하는 거지.'라는 것과 '언제쯤이면 라면을 이렇게 자주 먹는 습관을 고칠 수 있을까? 비행을 그만두면 이 습관이 사라질까?'이다.
스스로 이 습관을 고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밤늦게 먹게 되는 시간과 더불어 라면을 먹고 나서 바로 피곤해서 침대에 누워 자게 되니 역류성 식도염에 쉽게 걸리고 내 몸에 절대 좋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비행하는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잘 안 먹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어쩌면 라면이 그날의 내 정식 첫 끼라고 봐도 무방한 날이 종종 많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비행이 끝나기 전에 기내에 실리는 음식을 먹으면 어떻겠냐고 다들 물어볼 것이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기내에 실리는 음식을 먹을 바에야 차라리 '라면'이나 다른 음식을 집에서 먹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실예로 승무원들끼리 하는 농담이 있다며 예전에 해당 내용을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본 적이 있다.
국내항공사 승무원 후배가 선배에게
"어머, 선배님! 어쩜 그렇게 피부에 주름도 없고 좋으신가요? 비법이 뭔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배가 웃으면서 하는 말
"하하하. 기내 음식 먹어서 그래. 기내 음식에 방부제 엄청 들었잖아. 기내 음식 방부제가 내 피부에도 스며들어서 그래 ^^"
그렇다. 기내 음식에는 방부제도 많이 들었지만, 땅에서 먹는 것처럼 맛있는 맛을, 인간의 감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기압차가 큰 하늘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소금이며 설탕이며 MSG가 많이 들어간다. 이런 기내 음식이 맛은 좋을지라도 결코 몸에 좋을 리는 없다. 더군다나 승객들 입장에서는 어쩌다가 타는 비행기 여행일 경우에는 괜찮다만, 우리는 여행이 직업인 지라 거의 매일 먹게 되니 결코 몸에 좋을 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빵, 샐러드, 과자 같은 것들이 오히려 몸에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있고, 차라리 기내 음식을 먹으니 집에 와서 그냥 뭐라도 먹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다. 다만 문제는 그걸 '라면'으로 계속 때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음식으로 삶은 계란을 먹거나 간단하게 밥에 김치로 먹어도 라면보다는 나으련만, 그것이 귀찮아서 맛과 편의성을 라면으로 대체하려는 이 못된 나의 습관.
특히나 이 습관은 턴어라운드 비행(다른 나라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다시 되돌아오는 비행)에서 더 크게 발현된다. 아무래도 턴어라운드 비행으로 가게 되는 비행기 크기가 작은 기종이 많고, 기내에 많이 흔들려서 나도 모르게 멀미가 나거나 몸이 더 힘들어해서 나타나는 것 같다.
아휴... 이 못된 나의 습관은 정말 비행이 끝나면 사라질까? 사실 한국에서는 라면을 이렇게 먹은 적이 없었다. 라면의 참 맛을 정말 해외에 나와서, 승무원을 하면서 느꼈고, 느끼는 중이다. 사실, 나의 장거리 비행 캐리어 안에는 항상 봉지 혹은 컵라면이 단짝 친구처럼 들어있다. 간혹 나가기가 귀찮을 때 라면처럼 간단하고 맛있는 건 없다. 특히나 뽀글이 라면이 주는 특유의 맛이란... 생각해 보니 이 나쁜 습관을 어떻게 보면 '라면을 너무 자주 찾는 나의 모습'이라고 규정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맵찔이라서 살면서 불닭볶음면을 입에 댄 적이 없고 대고 싶은 생각도 없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비행을 시작하고 나서 까르보크림불닭볶음면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쉬는 날이면, 그전 비행이 끝나고 찾게 되는 마성의 매운 라면 친구가 내겐 되어버렸다. (FYI. 내가 먹을 수 있는 최대 매움 치는 까르보 크림불닭볶음면이다. 반드시 '크림'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아닌 다른 불닭들은 너무나도 내겐 맵다. 굳이 다른 매운 맛들을 찾아서 내 혀가 고통 속에 빠지도록 만들고 싶진 않다.)
어제 아침 11시에는 일어나서 준비해 떠나던 턴어라운드 비행이 끝나고 집에 오니 오전 12시 30분이었다. 정말 하루를 다 버릴 정도로 긴 시간의 턴어라운드 비행을 다녀왔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라면이 있는 창고 문열었지만, 어제만큼은 꾹 참고 그냥 씻고 잠에 들었다. 나도 모르게 '이제 그만 먹어..'라고 신호를 보낸 뇌의 걱정을 몸이 인지한 것 같았다. 최근에 너무 자주 먹어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몸에 대한 미안함이 보낸 신호였을지 모르겠다. 이 습관이 비행을 하는 동안은 쉽게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의식하면서 줄여가려고 한다.
앗.. 그렇다면 내가 비행을 앞으로 3년을, 아니 10년을 더 한다면 이 습관은 10년은 간다는 걸까? 갑자기 숙연해지면서 내 몸에게 너무 미안해진다. 내 몸아...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니 조금만 더 버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