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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수학쌤 Jun 11. 2024

너와 나의 스페인


너와 나의 스페인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고작 반 삼십의 녀석,

당황한 나는 지구 반대편으로 너를 데려간다.


만 킬로미터를 넘게 날아 도착한 곳. 스페인.

둘이서 배낭 하나씩 둘러메고 열흘간의 여행을 시작한다.


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무드의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람과 온도다.       

최근에는 본 적 없는 딸아이의 티 없이 맑은 미소를 보니 긴장해서 모두부 같았던 마음이 순두부로 풀어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풍경에 황홀해 하면서도 방금 지나친 거리가 금세 그리워져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이리도 아름다운 씬이라면 주인공이 아니라도 충분히 벅찬 행인 1, 2다. 지나가는 행인이 아닌 행복한 사람, 행인이다.


낯선 이목구비의 얼굴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그 속에 너를 던져 놓고 너의 표정을 돌본다.

새로운 환경이 주는 기분 좋은 긴장을 너도 즐기는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고민들을 지금도 생각하는지, 여행의 즐거움을 오롯이 느끼고 있는지, 무엇보다 나만큼 너도 행복한지, 물어보고 싶지만 말로 잘 표현하지 않는 너이기에 너의 눈동자, 눈썹, 입꼬리, 발걸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는다.


평소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나인데도 여기서는 연신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든다. 대충 찍어도 인생 샷이 나오니 폰이 손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팔은 그저 삼각대요, 엄지손가락은 셔터를 누르기 위해 존재 할 뿐이다.

노란 머리의 행인들 사이 까맣고 자그마한 너의 뒤통수를, 로맨틱한 분수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너의 우통수를, 지도를 보며 씩씩하게 길을 찾는 너의 좌통수를 카메라에 수없이 담는다. 정면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십 대 소녀가 모델인지라 촬영이 꽤나 까다롭다. 하지만 디스패치에 빙의된 나는 끝내 내가 원하는 샷을 찍고야 만다.


꿈을 꾸는 듯한 날들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시간을 켜켜이 쌓아가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명화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꿈과 현실의 경계가 일렁인다.

웅장하면서도 고혹적인 외관에 압도되어 홀린 듯 들어선 성당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올려다 본다. 그 옆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성스러운 빛이 쏟아지면 ‘오 주여, 성모 마리아여, 이 어린양을 구원해 주소서…’ 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멘트가 절로 나온다. 하마터면… 믿을뻔 했다.


스페인 광장에서 열정적인 춤을 추던 플라멩코 무용수의 카리스마도,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 톨레도의 비현실적인 풍경도, 카탈루냐 음악당의 황홀했던 오케스트라도, 내 가방을 훔쳐가다 나에게 잡힌 소매치기의 얼굴마저도 모두가 꿈처럼 아름답다.


나의 소중한 아이야.

세상은 생각보다 크고, 알록달록 재미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길.

일상의 고민들은 한 발 떨어져서 보면 그 무게가 다를 수 있음을 스스로 느껴보길.

전혀 다른 풍경 속에서 너의 고민의 무게를 덜어 내게 되기를 바란다.


에필로그

몬세라트 수도원에는 검게 변한 성모마리아가 있다. 그분은 다리 위에 어린 예수를 앉히고 한 손에는 구체를 올려두고 있는데, 이 구체를 문지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떠도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효험이 있으니 간절히 원하는 소원이 있다면 꼭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내 소원은 이루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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