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일 일어나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교권추락 사건들, 묻지 마 살인 사건 등을 보며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어가는 걸까요? 왜 이렇게 우리 사회가 많이 아픈 걸까요?
우리나라가 6.25 전후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살기 좋아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별로 기쁘지가 않네요. 산업혁명 이후 우리보다 앞 선 선진국들이 1~2백 년에 걸쳐 만들어왔던 사회 시스템, 법률, 국민소득, 국민의식등을 우리는 그 절반의 시간에 성취한 것처럼 보이긴 해요. 빨리 먹는 떡이 체한다고 우리 한국인들 성향대로 빠르게 빠르게 하려다 보니 정말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을 놓친 게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정확히 말하면 우리와 우리 부모 세대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출세 지향주의로 내달렸지요. 결과만 중요시하다 보니 그 과정은 '대충' ' 적당히'라는 풍조가 만연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처세술이 우리의 의식구조를 지배했습니다.
과거 유교 성리학적 사고가 사회를 관통하던 시대에는 그래도 '양반 정신'이 있었고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중시했었지요. 비록 가난했지만요. 그것은 정신이 물질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고고 함이었다고나 할까요.
그 정신적 유산이 6.25라는 전쟁을 분깃점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면서 그만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지요. 전쟁 전에는 우리 한국이 전형적인 농촌 사회였습니다. 대부분 자기가 태어 난 고향에서 부모의 농사를 물려받아 살아가는 토착형 사회였기에 그 지역사회에서 한 사람의 평판은 곧 그 가족과 집안 문중의 평판까지 아우르는 것이었으므로 처신을 신중하게 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씨족 사회였으니까요.
때문에 지금 같은 사회 병리현상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나대다가는 자기가 사는 좁은 지역사회에서 정말 매장되니까요. 바로 어느 집 자식이야?라는 추궁이 뒤따르니까요.
1960년대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던 산업화 시기에 농촌 인구가 도시로 급격하게 유입되면서 도농 간의 인구 구조가 뒤바뀌고 도시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의 각축장이 되어 갔습니다. 이른바 '먹고살아야 한다'는 대의명분아래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자리 잡은 사람들은 서로 안면몰수하고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눈치 볼 것 없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했습니다. '야, 이렇게 사니 편하네?'
과거 고향에서의 처신 따윈 걸리적거리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고루한 도덕은 필요치 않다는 거지요. 중국 제나라 관중은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 예절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삼강오륜 같은 성리학적 정신유산이 우리 사회에 끼친 건강함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유교에 대해 모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예전에 갑골학자 김경일 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읽고 격하게 공감했으니까요. 유교가 끼친 폐해가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 글의 핵심이 아니므로 논외로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개인을 평할 때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이래?' ' 그 사람 직업이 뭐래?' 이렇게 대부분 그 사람 현재의 결과만 궁금해합니다. 앞서 밝힌 대로 과정은 중요치 않고 결과만 중요시하는 사고입니다.
제가 아쉬운 것은 그 사람이 ' 자기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대?'를 궁금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결과만 중요시하다 보니 그 결과를 얻기 위한 그 사람의 인성과 노력은 도외시하고 (별 노력 없이) 부모의 후광을 입은 금수저였는지, 아니면 부정한 방법으로 그 자리에 있는 건지, 반칙하는 것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사람인지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과만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시키는 풍조가 만연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회'가 되어버린 거지요.
부모가 모두 먹고살기 바빠서 자식들 가정교육은 실종되어 버렸고 그 책임을 학교에다 전가시키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성적이 우선인 사회풍조 속에서 우리의 학교는 사람 되라고 가르치는 인성교육은 옛말이 되어 버렸고 대학 가기 위한 학원의 기능만 겨우 유지하고 있습니다. 왜 겨우냐고요? 그 기능마저 사설학원에 주도권을 빼앗겼으니까요.
사실 부모로서 가정에서 자식에게 제대로 인성, 예절 같은 밥상머리 교육을 시키지 못하면서 (방법을 모르니까) 자녀가 문제를 일으키면 그 책임을 학교 선생님에게 전가한다는 게 우스운 일 아닌가요? 그 당당함은 어디서 나온 걸까요? 문제아동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압니다.
옛날 우리 부모님들은 가난하게 살아서인지 아니면 예의를 더 소중히 여겨서인지 몰라도 선생님에게 핏대 올리거나 따지지 않았습니다. (교사의 자질 문제는 일단 보류하고) 요즘은 우리가 잘 살아서인지 인권이 신장되어서인지 목에 힘이 들어가서 선생님을 눈 아래로 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옛 부모들은 '내 자식이 부족해서, 내가 잘못 키워서 다 내 탓이려니'했지만 요즘은 '귀한 내 아이를 어디 감히' '네가 뭔데 내 아이를' 이런 태도입니다. 내 자식이 어떠한 괴물 짓을 하든 내겐 금쪽이일 뿐이라는, 자식농사 서툴게 짓는 젊은 부모들이 넘쳐납니다. 무식한데 자존감은 엄청 높습니다. 그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가 학교에서도 그렇게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회병리적 사건은 그 사람이 성장한 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결혼을 하지만 가정의 숭고함과 자녀교육 철학이 무지한 상태에서 아이를 낳기만 하지 가르치는 방법을 모릅니다. 배우자에 대한 존중과 성실함 부족, 가볍게 여기는 정조개념 등으로 가정을 쉽게 무너뜨리고 그 피해는 죄 없는 자녀에게 안겨집니다. 무너진 가정에서 자녀가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까요?
모름지기 가정을 이룬 부모들은 나름의 가풍(家風)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자식을 가축처럼 기르는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 윤리 도덕을 빼면 동물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장난이 아닙니다. 사회가 힘들게 돌아가는 악순환의 고리가 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건의 결과만 얘기하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그 과정은 도외시합니다. 상처가 곪아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히 낮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심각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과감히 제안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의 결혼제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으면 합니다. 정부에서 주도하든 아니면 민간에서 주도하든 우리의 청춘 남녀가 한 가정을 이루기 전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는 이 숭고한 일에 대하여 일련의 교육을 받고서 결혼하자는 겁니다.
설령 결혼식을 하지 않고 혼인신고만 하고 동거하더라도 자기 가정의 미래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이런 사전 교육을 이수하면 얼마나 다행일까요? 교육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분도 있을 테지만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단순하게 '잘 모르는 걸 배우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제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교육과정을 이수함으로 사회적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 결혼하기 전 건강진단서를 교환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사회풍조가 되었지 않습니까? 육체적으로 건강함을 증명하듯이 정신적으로도 건강함을 증명해야 옳지 않을까요?
이런 과정이 이미 우리나라에도 다수의 민간단체에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결혼예비학교'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가정과 자녀교육 예비학교'도 좋겠지요. '아버지 학교'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정부예산으로 기관을 만들고 (아니면 민간위탁을 하든지) 전문가를 통해 우리의 청춘남녀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우리 사회가 훨씬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가정법원에 파리 날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학교 커리큘럼에 이런 교육이 거의 없습니다. 정말 무엇이 중한지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결혼예비과정 교육을 받음으로 해서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예방하고 우리의 자녀를 건강하게 양육하여 사회에 내놓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한 일입니까? 건강한 부모에게서 건강한 자식이 나고 건강한 사회로 선순환되는 것입니다.
제가 만약 국회의원이라면 혼인신고나 자녀 출생신고할 때 결혼예비학교 교육이수증을 첨부하면 백만 원을 지급하는 입법을 하고 싶습니다.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을 테니까요.
이 글을 맺으면서 해법을 이런 제도적인 방법으로 풀어야 하나? 하는 아쉬움이 떠나질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