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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성호 Cha sungho Jul 26. 2023

도배사의 하루

갓 부러뜨린 칼날을 그을 때의

그 깨끗하며 서늘한 느낌이여!

단 한 번의 손놀림에

자투리 종잇장은 발아래 뒹군다

똑같이 생긴 회색빛 콘크리트 벌집

십이 층 어느 한 구석에서

쉰내 나는 땀 냄새, 풀 냄새로 버무려진 채

본능적으로 아니, 삶의 몸부림으로

좁다란 내 인생을 날렵하게 줄타기한다


스펀지로 몰딩에 묻은 땀을 닦아내면

미세한 손 끝의 감각은

깨끗한 한 줄기 직선으로 피어난다

삶이야 때론 구겨질 때도 있지만

내 손에 쥐어진 한 자루 솔은

조금의 구김도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도배장이의 자존심이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생존의 절박함이다


라디오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 무인도 같은 공간에서

그나마 피곤을 잊게 하던

옆방 동료의 뽕짝 가락도

한 소절 한 소절 끊어지다

이젠 들리지 않는다

때 묻은 우마의 삐걱대는 소리가 잦아들고

어느새 서쪽 창가에 저무는 햇살이 길게 드리우면

오늘도 나는 그 회색 빛 보기 싫은 콘크리트 벽들을

죄다 하얀 종이로 감추고서

허리춤의 연장집을 푼다



# 2002.7.16作

에필로그 - 불혹의 나이에 새로운 육체노동자의 세계로 입문했다. 하루 일당 3,4만 원으로 나의 의지력을 저울질하던 힘든 시기였다. 여기서 물러서선 안된다는 정신으로 버티어 내었기에 오늘의 삶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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