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새해가 밝으면 동생이랑 매년 하는 우리만의 루틴이 있다. 색다른 장소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작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달력과 사진, 다이어리를 보고, 그다음 올해의 목표와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올해 적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바로 '2025년 12월,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 완주하기'였다. 무언가 좋은 게 있으면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함께 하고 싶듯이 마라톤의 짜릿함을 동생에게도 느껴주고 싶었다.
"하와이 여행도 할 겸, 우리 마라톤 대회 같이 나가볼래?" 나는 동생을 은근슬쩍 꼬드기기 시작했다.
"완주하면 하와이 꽃다발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고, 달리다 보면 주민들이 직접 오렌지를 건네줘. 시작할 땐 폭죽이 터지면서 완전 축제 분위기야!" 동생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타임 리밋도 없어서 배고프면 주유소 들려서 무스비 사 먹으면서 완주해도 돼. 2025년 연말이면 거의 졸업할 때쯤 아니야? 하와이에서 연말 보내면 평생 기억에 남을 거야." 결정타를 날렸다.
그렇게 등록한 2025년 하와이 마라톤.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딱 한 달 조금 더 남았다. '하와이는 언제 가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D-day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1월에 등록 버튼을 누를 때만 해도 순수했다. '하와이 마라톤 대회'가 아니라 '하와이 마라톤 축제'를 즐기러 간다는 마음이었다. 친한 친구들도 "응원하러 갈게!" 하며 함께 여행에 동참했고,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훈련을 시작하고 주변에 마라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뭔가 변하기 시작했다. 축제를 즐긴다던 초심은 사라지고, 기록에 대한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동생아, 끝까지 같이 뛰자!"던 다짐은 어느새 "나 먼저 완주하고 돌아올게"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도 내 욕심이 보기 싫으셨는지, 5월엔 돌바닥에 걸려 넘어지며 무릎을 제대로 다쳤다. 몇 주 전에는 갑자기 발가락 통증이 시작되서 또다시 달리기를 쉬어야 했다. 못 달리는 날들이 계속되자 마음은 조바심으로 가득 찼고, 금단증상을 겪는 것처럼 온종일 축 처져 있었다. 예전엔 Strava에서 친구들의 러닝 기록을 보며 서로 으쌰으쌰 응원했는데, 정작 내가 못 뛰는 상황이 되니 그 화면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워 앱을 아예 열지 않았다.
'혼자 달려도 좋기만 했던 그 초심은 어디로 간 걸까?' 스스로에게 물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멈추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그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고민이 많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를 때 달리면, 나는 움직이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스트레스가 조금 풀린다.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꾸준히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포츠인것 같다. 마라톤 대회에 나가보면 나보다 훨씬 더 잘 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다. 부상으로 아예 뛸 수 없게 되는 것보다는 기록 욕심을 내려놓고 완주와 즐김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냐고?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다.
2025년 12월 14일 호놀룰루 마라톤 당일을 상상해본다. 새벽 5시, 하늘을 가르는 폭죽 소리와 함성이 울려 퍼진다. 신혼부부 러너들, 나막신신고 달리는 러너, 파인애플을 머리에 이고 달리는 러너등 온갖 코스튬을 입은 러너들이 스타트라인에 선다. 해가 떠오르면 와이키키 해변가가 황금빛으로 물들고, 그 풍경을 바라보며 달린다. 그다음부터는 다이아몬드 헤드 오르막길. 땀에 흠뻑 젖고 끈적끈적해진 몸, 납덩이처럼 무거워진 다리를 억지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딛는다. 하와이 주민들이 건네주는 오렌지 한 조각이 과연 나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친구들은 피니시 라인에서 기다려주겠지…? 동생은 어디쯤일까…
완주 후 샤워를 하고 와이키키 해변가로 돌아간다. 무스비랑 시원한 코코넛 워터를 마시며 따뜻한 바닷물에 몸을 푹 담근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그 순간을 온전히 느낀다. 이 상상 속에서 달리기 기록만 쏙 빼버리면, 생각만 해도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근데 동생은 아직도 달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