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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멘탈 Jul 13. 2023

나의 어린 시절

라떼는 말이야 이랬단 말이지

나는 강남 서초구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녔다. 나는 부족함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기억하지만 사실 지금 돌아보면 우리 집 가정형편은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다. 반면에 내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이 강남 서초구 아파트에 살았으니 소위 잘 사는 집 애들도 많았던 것 같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 어린 시절에는 어디에 살고 집이 월세든 전세든 부모의 직업 등을 가지고 괴롭힘 당하거나 놀림당하지 않았다. 나는 동네에서 유명한 오지라퍼에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초등학교 때는 매년 반장에 걸스카우트 대보장까지 했다. 반장 돼서 집에 오면 엄마가 너는 누굴 닮아 그러니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슈퍼 외향적인 사람인 줄 알고 살았다. 그랬던 나도 중학교 가는 건 무서웠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남자애들은 다 근처 남중으로 빠지고 여자애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중학교 한 반에 같은 초등학교에서 온 애들이 서넛밖에 안 됐다. 그러다 보니 편하고 친한 친구들은 다 잃고 새로운 친구들을 다시 사귀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중학교 가는 게 싫었다. 무시무시한 소문도 돌았다. 어느 중학교에 어느 선생이 변태라더라, 학주가 엄청나게 아이들을 잡는다더라, 선배한테 인사 안 하면 머리끄덩이 잡힌다더라 등등. 그런 소문들은 순진무구하던 90년대의 초딩들이 놀이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중학교 갈 걱정을 하며 두려움으로 덜덜 떨게 하고도 남았다.


내가 배치된 중학교는 한 학년에 9개의 반이 있었고 한 40명 정도의 아이들이 한 반이었다. 내 1학년 담임은 심지어 우리 엄마도 들어본 적 있는 그 무시무시한 소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빽빽이(A4용지 한 장을 빽빽하게 써서 공부의 흔적을 남겨야 하는 일종의 공부암기법)를 시키고, 지각을 하면 벌금을 걷고, 학급 시험 평균 점수가 떨어지면 모두가 책상에 무릎 꿇고 올라가 허벅지를 맞고, 자체적으로 수련회를 계획해서 전체 학급을 끌고 가는 희대의 괴짜 담임이었다. 우리 반에는 나와 같은 초등학교에서 온 여자애들이 3명이 있었고 그 밖에 죄다 모르는 아이들이었다. 아주 불편하고 어색한 시작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1학기 학급 회장이 돼 있었다. 여자 회장이라고는 전교에 1학년에 나와 3학년에 한 명 그렇게 단 둘이었는데 여자 회장들이 흔하지 않다 보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중학교 들어가자마자 그야말로 쎈 여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의 괴짜 담임은 방송부 담당선생이었는데 점심시간이면 "1학년 2반 회장 XXX 지금 당장 눈썹 휘날리며 방송실로 뛰어오도록' 하며 나를 부르는 방송을 전교에 해대고는 했다. 불러다가 방송실에서 어깨를 주무르라고 하거나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켜댔다. 그랬다. 지금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그 시절에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났다. 그러다 보니 교무실로 시도 때도 없이 호출되는 나를 궁금해하던 전교생의 수군거림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지금 생각만 해도 참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일상이었다. 중학생이라는 새로운 산에 오르면서 짐이란 짐을 죄다 매고 지고 산을 올라가는 꼴이었다. 이 밖에도 괴짜 담임의 만행은 셀 수 없이 너무도 많아서 일 년 만에 나는 찐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말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1학년이 지나 2학년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또 회장이 돼 있었다. 미치광이 괴짜 담임에서 벗어난 2학년은 즐거움 그 자체였다. 반 전체 애들하고 고루고루 다 잘 어울려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뛰어다니며 신나게 놀고는 했다. 1번부터 36번까지 아이들 번호와 이름을 이십 대 후반까지 줄줄 외울 정도로 난 2학년 내 반에 애정이 있었다. 그 애정에 살짝 물을 끼얹은 건 또 역시 담임이었다. 나의 2학년 담임은 키가 크고 매우 마른 체육선생이었는데 나에게 자기 반 아이들 당번을 짜게 하고는 체육실 청소와 체육실 근처에 있던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 말투도 사납고 행동도 다정한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 선생은 나를 알게 모르게 미워하는 걸 티 내고는 성적표에도 아주 찝찝한 코멘트들을 남겼다. 이건 나중에 다 커서 안 사실이지만 대놓고 우리 엄마한테 촌지를 달라고 했던 속이 시커먼 타락한 선생이었다. 담임을 빼고는 매일 학교 가는 게 즐거웠던 2학년이었다.


3학년이 되었다. 내가 속한 반에 소위 잘 나가는 일진이 한 명 있었는데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내 뒤에 앉아 내 욕을 하고 회장 선거 때는 나를 뽑지 말라고 다른 친구들을 선동했다. 그래서 회장 선거에 처음으로 떨어졌다. 너무 굴욕적이고 서글펐지만 담담한 척 대인배 행세를 했다. 회장선거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내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이 충분히 있었고 그래서 대 놓고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렸을 나를 떠올려보니 너무 안쓰럽고 가엽다. 내 주변에는 외고, 과학고, 예고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나는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덩달아 불안에 떨며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다. 숨 막히는 일상이 이어졌다. 중간고사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계산을 해봤다. 이렇게 숨 막히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내가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는가. 수능은 또 어쩐단 말인가.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나를 외국에 보내고 싶어 했다. 여유도 없었으면서 어떻게든 내가 원한다면 보낼 심산이었다. 본인이 누리지 못했던 배움의 길이 외국에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 신세대 엄마 였다. 엄마는 자기는 약해서 못할 테지만 나는 할 수 있을 거랬다. 그건 거짓말이다. 엄마였으면 훨씬 잘했을 거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엄마가 때때로 나를 떠봤다. 외국에 유학 가고 싶으냐고. 그때마다 나는 단호박이었다. 엄마랑 떨어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를 가서 수능 준비할 생각에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한민국에서 수능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수능은 고사하고 3학년 중간고사도 해낼 자신이 없었다. 빨리 도망가고 싶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4월의 어느 날 중간고사 직전에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갈래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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