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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멘탈 Jul 17. 2023

나의 어린 시절

엄마 나 갈래. 유학.

내가 다섯 살 무렵 엄마는 고모 밑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기 때 나는 매우 안 먹고 매우 안 자서 엄마를 괴롭히던 ‘투 스트라이크‘ 아기였는데 그 대신 잘 울지 않고 방긋방긋 잘 웃었다고 한다. 그런 나를 범띠 여자애는 기가 세다며 기를 눌러야 한다고 굳이 엄마 앞에서 갓난쟁이 뺨을 때려 울렸다던 고모였다. 그런 괴팍한 고모가 엄마에게 따뜻할 리 없었다. 온갖 구박을 받아가면서 엄마는 묵묵히 일을 배웠다.


우리는 그즈음 부암동 하림각 근처의 산동네에 살았는데 엄마는 어린 나를 데리고 아침마다 꼬박꼬박 버스를 타고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남부터미널까지 출근을 했다. 그래서 나는 3호선 역들을 줄줄 외울 수 있었고 그건 곧 내 장기가 되어 그걸로 주변 어른들한테 맛있는 것을 얻어먹고 예쁨 받고는 했다. 엄마는 머지않아 독립해 내 이름을 넣어 만든 자기 가게를 차렸다. 엄마는 눈치가 빨랐고 뭐든 빨리 배웠고 거기에 솜씨도 좋았다. 그 덕에 비록 가난에서 시작했지만 우리 집 형편은 살금살금 나아지고 있었다.   


엄마는 스물 하나에 결혼을 해서 스물둘에 나를 낳았다. 엄마는 나를 엄하게 키우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건 ‘어린 엄마’ 밑에서 자라서 라는 소리를 안 듣게 하려는 엄마의 피나는 노력이었다. 아빠는 과묵했고 나 역시 살갑고 어리광 부리는 딸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는 나 스스로를 아들 같은 딸이라 칭하며 무뚝뚝 한 외동딸로 살았다. 그때의 우리는 감정을 공유하는 것에 매우 서툴렀고 또 무지했다.


갑자기 뜬금없이 유학을 가겠다는 내 말에 엄마는 놀랠 만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딸내미가 호떡 뒤집듯 마음을 바꿀까 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에는 유학 가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고 지금의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뭐든 발품을 팔아 정보를 얻어야 했다. 여권을 신청하고 서류를 준비하고 해야 할 것은 많았지만 엄마는 차근차근, 하지만 빠르게 내 유학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학이라 하면 영어를 쓰는 나라로 가는 것이 정해놓은 일처럼 당연했고 그래서 미국, 캐나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4대 유학지였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디로 갈 건지 정하는 문제는 제일 중요한 일이다. 어찌 된 게 엄청나게 고심해서 결정해야 하는 일에 그리 고민이 길지 않았다. 나는 오페라하우스에 대한 환상이 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마, 아빠의 지인이 호주에 가서 가족과 살고 있었다. 그 ‘삼촌’이 자기 집에 와서 하숙을 하라고 했다. 주거지가 해결이 돼버리면서 내 유학지는 호주로 정해져 버렸다.


내가 유학을 가겠다고 하니 엄마도 준비를 하긴 했지만 차마 나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낳아 고생하며 키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막상 혼자 외국에 보내려니 얼마나 겁이 났을까. 엄마가 나에게 말하기를 엄마는 나를 이길 수 없어서 나는 아빠랑 호주에 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괴상한 이유지만 그 당시 우리 집의 실질적인 가장이었던 엄마는 한국에 남아 돈을 벌어야 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말도 안 섞던 세상 어색한 사이로 지내던 아빠와 호주를 가게 됐다.


나는 철이 빨리 든 줄 착각하고 살았다. 남들보다 내가 더 어른스러운 줄 알았다. 엄마의 심정을 당연히 알리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어렸고 그랬기에 도망치듯 유학을 결정하는 게 가능했다. 철딱서니 없이 결정한 내 선택이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비용에 대한 것 또한 열다섯 짜리가 뭘 그리 속속들이 알았겠는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서 나에게 돈을 보내야 하는 엄마의 희생도 헤아릴 리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을.


이 와중에 나는 무단결석을 시전 했다. 늦잠을 자고 학교에 안 가고 시험 안 볼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났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이 걱정스럽게 전화해서 그래도 가는 날까지는 학교에 출석은 하지 않겠냐며 엄마를 설득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고 학교에 갈 생각도 중간고사를 볼 생각도 없었다. 바락바락 우기는 나를 이길 사람은 없었다. 사복을 입고 학교 끝나는 시간에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놀러를 가고 진짜 철없는 짓만 해댔다. 뭣에 씌어 그렇게 신이 났었는지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별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없었다.


열다섯 생일 직전 봄바람이 살랑이고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4월에 시작한 유학 준비는 한 달도 안 돼서 끝났다.

2001년 5월 18일. 출국 날짜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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