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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멘탈 Jul 22. 2023

어서 와 고난의 길에.

이별이 코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미 엎질러진 물


이 말은 내가 놓였던 상황을 잘 설명하는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별 생각이 없었나 보다. 내가 원해서 결정한 일인데 막상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것이 사람 일이라더니. 비누와 치약 같은 생활용품이 비싸다는 삼촌의 말에 생필품을 몽땅 샀다. 사람 키만큼 커지던 시커먼 이민 가방에 바리바리 짐을 챙기고 떠날 준비를 했다.


드디어 출국날, 어마어마한 짐을 이고 지고 공항에 도착했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그 해에 인천공항이 개항했는데 진짜 공항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처음 보는 공항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압적이었다. 힘겹사리 짐을 부치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KFC로 갔다. 엄마는 '이거 이제 못 먹을 거잖아' 하면서 내가 좋아하던 비스킷을 몽땅 사 왔다. 지금은 생각만 해도 울컥하지만 그때는 뭐에 홀린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걸 또 아쉬워하며 먹었다.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별이 코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정확히 무슨 생각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난 괜찮았다. 적어도 출국장 앞에 설 때까지는 말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던 모녀가 공항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눈물이 터졌다. 그런 식의 이별은 해본 적이 없었다. 서로에게 어떻게 안녕을 고해야 할지 엄마도 나도 알턱이 없었다. 엄마 아프지 말고 잘 있어, 나 공부 열심히 할게 이런 말 할 정신은 당연히 없었다. 우리는 이별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 시간을 넉넉히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인천공항이 그렇게 클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시간적 여유마저 없었던 나는 눈코입이 빨갛게 돼서 빨리 가라던 엄마를 뒤로 하고 아빠 손에 붙들려 엉엉 울며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엉엉 울며 들어서는데 웃프게도 여권을 찾아 내밀고 보안검색대를 지나고 짐 검사를 하는 통에 눈물이 쑥 들어갔다. 보딩 시간이 다 된 통에 게이트까지 헐레벌떡 뛰어야 했다. 정신없이 뛰어 비행기에 타서 벨트까지 차고 나니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없다는 생각이 밀려오며 현타가 왔다. 엄마를 언제 볼지 계획 같은 것도 없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머리가 터질 거 같았다. 눈물 콧물이 줄줄 흘렀다. 비행기 타면 좋을 줄 알았는데 난 처음 타는 비행기에 앉아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가여운 아빠는 어쩔 줄 몰라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딴 곳을 보며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렇게 비행기가 떴고 나의 피란만장한 유학길이 시작되었다.


여담으로 내가 떠나던 그날에 내 중학교 3학년 마지막 짝꿍이 공항까지 배웅을 와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더 고마운 일이다. 그때 나는 나와 아빠가 떠나고 난 후 혼자 남을 엄마는 생각지도 못한 바보 같고 어리석은 딸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너무 고마운 그 아이가 인천에서 서울에 가는 내내 훌쩍거리고 우는 통에 엄마도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2001년 5월 18일 그렇게 엄마도, 나도, 아빠도 고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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