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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멘탈 Mar 20. 2024

이제 아파트는 안 되겠어

3년간의 대장정

사실은 아직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믿기지가 않는다. 팬데믹 이라니. 정말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일어났다. 코로나 덕분에 사람들은 공간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걸 깨달은 사람 중에 나도 껴 있었다. 아파트의 사는 것에 그동안 알지 못했던 큰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에 엘리베이터 타는 것부터 너무 불편했다. 


코로나도 문제였지만 우리한테는 다른 문제가 또 있었다. 아파트에 문제가 있어 전체 수리 공사를 해야 했다. 우리 집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다른 집들은 발코니 물이 집 안으로 역류를 하고 그래서 곰팡이가 생기는 등 물로 인한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지은 지 7년이 안된 아파트였기 때문에 빌링인슈런스(시공사 보험) 커버가 있었고 그래서 시공사에 책임을 묻게 되었다. 


놀랍게도 호주의 많은 아파트(거의 모든 아파트)가 이런 문제를 겪는다. 그러다 보니 집주인들이 시공사를 고소하는 일도 자주 생기기도 하는데 시공사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부도를 내고 도망가는 일도 파다하다. 우리 아파트도 시공사를 고소해야 할 상황이 생길지도 몰라 변호사 비용까지 임의로 계산해 봤는데 그 비용도 엄청났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우리 아파트는 시공사에서 어느 정도의 책임을 지기로 했다. 그렇지만 나머지 비용은 오롯이 36개의 가구의 집주인들의 몫이었다. 처음에 이 상황을 인지했을 때는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는데 많이 우울했다. 이 아파트를 선택한 내 잘못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어째 어째 겉으로는 잘 해결된 것 같았지만 그래도 5만 불 정도의 생돈이 공사비용으로 나갔다. 


아파트나 타운하우스 등을 소유하면 3개월에 한 번씩 'Strata fee' (공동관리세)를 낸다. 공동으로 쓰는 모든 것에 대한 비용(전기값, 물값, 청소비, 수영장이나 짐이 있다면 그 관리세 등등)을 집주인들이 나눠서 내게 된다. 공사 비용은 'Special levy' (특별징수)로 더해져서 우리 같은 경우는 세 달에 700불-900불 정도 내던 관리세를 3000불-5000불까지 내게 됐다. 


갑자기 큰 지출이 훅훅 나가니까 우리 집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들 집의 문제를 공동 부담으로 해결해야 하는 게 너무 억울하기도 했다. 거기에 더 나아가 아파트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것도 물 문제가, 나중에 집을 되팔 때도 골치가 아플 거 같았다. 그래서 '아파트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이 난리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아파트만이 아니라 그게 뭐든 스트라타(공동주택관리) 있는 집(타운하우스 역시 포함)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은 하나였다. 하우스. 코로나가 시작하기 전부터 집을 보고 있기는 했다. 우리가 하우스를 사는 것이 현실 가능한 일인지 알기 위해, 시세 파악을 하기 위해 부동산 웹사이트를 보는 것은 페이스북을 보는 것 마냥 이미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럭다운 때문에 집에만 있어야 했는데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 소음 때문에 공사판에 사는 것 같았다. 재택근무를 하며 줌미팅을 해야 하는데 시끄러워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게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설상가상 발코니는 공사한다고 다 가려놔서 햇빛도 뷰도 다 차단되었다. 나도 오빠도 우리 강아지들도 코로나 때문에 답답하고도 깜깜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사 가는 게 어느 때보다 간절해졌지만 사실 우리가 사고 싶은 집을 찾아도 문제, 집을 사도 문제, 그 공사판에 계속 살아도 문제였다. 어느 하나 시원한 답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심히 집을 찾았다. 매일매일 몇 시간씩 부동산 웹사이트를 봤다. 앞이 안 보이던 코로나같이 우리의 집 찾기 대장정 역시 끝이 보이지 않았고 그 대장정은 장장 3년간 이어졌다. 한주 내내 부동산 웹사이트를 보고 또 보고 오빠랑 금요일 저녁에 같이 앉아 갈 집들을 선정했다. 그리고선 토요일 아침부터 하루종일 집을 보러 다녔다. 많이 볼 때는 하루에 열 개도 넘게 보러 다녔다. 


문제는 우리만 답답한 게 아니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원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규칙 때문에 집 인스펙션 하는 것은 한껏 더 어려워졌다. 거리 유지를 해야 했고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었다. 집 하나 볼래도 길게 줄을 서야 가능했기 때문에 30분간의 오픈 하우스 시간 안에 집을 못 보는 일도 허다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매주 토요일마다 집을 보러 다녔다. 차를 타고 집을 보러 다니다가 주차하는 게 시간이 더 걸려서 자전거를 타고 집을 보러 다녔다.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두 번 세 번 시간이 될 때마다 가서 봤는데 그렇게 마음을 쏟은 집이 무슨 이유에 건, 돈 때문이던 다른 문제가 있어서건, 포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계속 한 끗씩 모자랐다. 돈이 부족하든, 집이 부족하든, 뭐든 속 시원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집을 계속해서 찾고 보러 다니고는 있었지만 뭐가 맞는 건지 뭐가 틀린 건지 알 길도 자신도 없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원하는지 않는지 조차 나중에는 흐리멍덩해져서 '아 진짜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사실 어느 한순간도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즐겁거나 신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집을 보러 다닐 때 신이 나고 재미있다던데 난 그냥 너무 힘들었다.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비참한 기분이 들었고 내가 세상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집을 보러 다니는 게 취미라던지 재미가 있다던지 하는 사람들의 얘기에 짜증이 났다. 대체 어느 부분이 재미가 있다는 거지?


하루는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고 집들을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줄줄 났다. 집이 이렇게나 많은데 내 집은 없는 건지, 그 누구도 등 떠밀지 않았는데 내가 사서 고생을 하면서, 왜 이렇게나 서럽던지. 내 정신이 피폐해질 때에 오빠는 나를 꼭 붙잡았다. 오빠도 분명 힘들고 막막했을 텐데 엄청난 끈기와 인내로 우리를 이끌어 나갔다. 내 희망의 불씨가 히마리 없이 꺼지려고 할 때면 우리 집이 곧 나타날 거라고 바람을 훅훅 불어넣어 꺼질만하면 또 살리고 꺼질만하면 또 살리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우리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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