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호주에 온 지 삼일 만에 시드니 도심으로 간다. 오늘도 날씨는 우리 편이 아니다. 하늘에는 언제 비가 와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물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늘 일정은 애피타이저, 메인 디쉬 그리고 후식으로 이루어진 코스 요리에 비교할 수 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메인 디쉬로 투어가 이루어졌다. 오늘의 메인 디쉬인 오페라 하우스를 보기 앞서 애피타이저로 시드니 동부 지역을 먼저 들렸다. 시드니 동부지역은 한국으로 치면 강남 같은 곳이다. 땅 값이 비싸고 부자들이 사는 동네말이다. 그렇다고 단순이 부자동네 구경하러 간 건 아니다. 시드니에 대한 전반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곳이기에 아침 일찍 동부로 향했다.
첫 번째 들른 곳은 더들리 페이지다. 이곳은 언덕 위에 작은 공원인데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더들리 페이지라고 불린다. 비싼 주택들 사이로 공원이 있을 수 있는 것은 기부 조건이 이 땅에 건물을 짓지 않는 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멀리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리지가 보였고 바다 위 많은 요트와 크루즈들이 이곳이 항구 도시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항구 뒤로는 높은 건물들이 회색 빛 나무처럼 줄을 지어 세워져 있었다. 아마 시드니를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을 선택하라면 난 여기서 찍은 풍경사진을 고를 것이다. "도시", "항구" 이 두 개의 단어가 시드니를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공원에는 관광객인 우리를 빼고는 강아지 산책 나온 동네 사람들이 있었는데 갑자기 삐뚤어진 생각이 들었다. 더들리 페이지는 '과연 누구를 위해 기부를 한 것일까?' 시드니를 방문한 여행자를 위한 것일지 아니면 시드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을 위한 것일지 말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멋진 풍경을 공유하고 싶어 독특한 조건을 걸어 기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들리 페이지는 너무 부자 동네 아닌가? 게다가 나에게는 그다지 멋진 풍경으로 와닿지는 않았다. 오롯이 풍경을 감상하기에는 시야에 거슬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더들리 페이지 앞으로 지어진 주택들은 너무 높았고 시드니 도심에 세워진 빌딩들은 너무 무질서해 보였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리지는 너무 멀오 보였다. 탁 트인 곳이라 그리 나쁜 풍경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투덜이 모드 스위치가 켜진 것이다. 무엇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까? 풍경을 망치는 노란색 크레인? 아니면 공원 근처 부잣집들? 잔뜩 흐린 날씨? 물론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날 가장 불편하게 한 건 시간이었다. 더들리 페이지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사진 찍는 시간을 빼면 오롯이 풍경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좋은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멋짐에 빠질 수 없었다. 호주에 와서 나는 완전히 삐뚤어져 자주 투덜이 모드였다. 하지만 삐뚤어진 마음은 여행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모든 걸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었다면 그 짧은 시간마저 즐기며 멋진 기억만 남겼을 텐데 삐뚤어진 마음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동쪽 해안 절벽 갭팍(Gap Park)에 도착했다. 그대로 해석하자면 틈새 공원(?)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남태평양해에서 시드니만으로 들어가는 곳으로 어떻게 보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틈이다. 절벽 높이를 보니 시드니항까지 연결된 물길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이 되었다. 큰 배가 정박하기에 충분히 깊었기에 크루즈를 비롯한 군함까지 정박이 가능해지며 항구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절벽을 따라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보니 산책을 하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을 보니 부족한 여유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다음 장소인 본다이비치를 가서도 마음이 들뜨지는 않았다. 도심 가까이 있어 접근성이 좋은 해변으로 파도가 강해 서핑 장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번에는 약간의 여유를 즐길 시간을 받았기에 기분 전환하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하지만 도착한 해변은 너무나 한적했다. 아니 한적하다 못해 흐린 날씨처럼 무채색 느낌까지 들었다. 게다가산책을 하려고 하는 순간 비가 내려 바로 차로 복귀 했다. 이래저래 오늘 여행 기분은 매우 흐림이다.
애피타이저를 다 봤으니 이제 메인 디쉬를 만날 차례지만 코스 요리에는 와인이 빠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메인 디쉬를 더 돋보이게 해주는 요소가 필요하기에 시드니 타워로 향했다. 오늘 여행의 와인 역할은 시드니 타워 80층에 있는 전망대가 맡았다.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면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스리랑카에 갔을 때 시기리야 입구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길이 무서워 정상까지 못 올라갔을 정도니 타워는 오죽할까. 전망대에 올라가면 처음에는 괜찮은데 창 밖으로 아래를 보면 그때부터 왠지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고 머릿속에서는 '전망대가 쓰러지면 어쩌나'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그래서 지나가듯 풍경을 보고서는 나름대로 안전지대(?)에서 머물다 내려오기에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게다가 전망대 유리창은 사진을 찍는 데 너무 방해가 된다. 반사광 때문에 온전한 풍경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시드니 타워 전망대가 오늘의 메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볍게 즐긴 뒤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애피타이저에 와인까지 경험했으니 오늘의 메인 디쉬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보러 갔다. 먼저 오페라 하우스와 하버브리지가 한눈에 보이는 건너편 공원으로 갔다. 바다 옆 새하얀 오페라 하우스를 보니 진짜 시드니에 온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하늘은 나에게 즐길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로 비가 내렸기 때문이다. 어쩌겠는가. 날씨는 그 누구도 조절할 수 없지 않겠는가. 심술 가득 한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하늘에서 벌을 주는 건가 싶었다. 원래 대로라면 공원에서 오페라 하우스까지 걸어가는 코스가 있어 바닷가를 산책하며 걸어갈 수 있지만 굵어진 비 때문에 결국 차로 이동하기로 했다. 가까이서 본 오페라 하우스는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조로운 색과 반복되는 지붕의 패턴이 바닷가에 위치한 오페라 하우스를 더 돋보이게 한다. 게다가 시선의 방향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입구를 찾아다녔는데 안에 분명히 사람들이 많았는데 문은 잠겨져 있었다. 곳곳에 포스터가 붙여져 있는 것을 보니 오늘 공연이 있는 것 같았다. 어렵사리 다른 입구를 찾아 들어갔더니 사람들은 공연장 안으로 들어간 듯 조용했다. 잠시 후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교향악단의 연주가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로비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자니 이런 게 여행이지라는 생각에 투덜이 모드가 꺼졌다. 음악을 들은 그 찰나의 시간에 '여유'라는 단어가 내게 새겨졌다. 오페라 하우스의 매력 때문인지 아니면 교향악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찰나의 시간 속에서도 여유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떠날 때 되니까 깨닫게 되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는 자신이 왜 오늘의 메인 디쉬인지를 훌륭하게 증명했다. 이제 오늘 코스의 마지막 후식이 남았다. 오늘의 마지막은 크루즈를 타고 ㅈ녁을 먹으며 시드니의 야경을 보는 일정이다. 배를 타고 저녁을 먹으며 도심의 야경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예전에 상해 출장 갔을 때 경험을 했는데, 그때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이번에도 기대가 컸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은 날씨였다. 크루즈를 타기 직전까지 비가 왔기 때문이다. 배는 생각보다 꽤 컸다. 크루즈는 총 세 개의 층으로 되어있었는데 두 개의 층이 테이블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양쪽 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식사를 하면서 밖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물론 맨 위층에 전말을 볼 수 있는 곳이 따로 있다. 배가 커서 안정감이 있었지만 반면에 사람이 많아서 시끌벅적 어수선했다. 식사를 하며 여유롭게 밖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밥을 빨리 먹고 밖으로 나왔다. 디너 크루즈의 장점은 바다에서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를 보는 재미와 시드니의 야경을 보는 것도 있지만 아마 백미는 일몰일 것이다. 하지만 날씨의 저주 때문에 일몰을 볼 수 있는 행운은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의 아쉬움을 아는지 구름 사이로 살짝 일몰의 색을 보여주었다. 쌀짝 보이는 하늘색을 보니 내 아쉬움은 더 짙어졌다. 그래서인지 시드니의 야경은 기대보다는 화려하지 않아서인지 크게 인상 깊지 않았다. 그렇게 살짝 아쉬운 후식을 끝으로 오늘의 코스 요리 같았던 시드니 여행이 끝이 났다.
시드니는 뉴질랜드에 비해 조금 아쉬움이 많았던 곳이었다. 그렇다고 시드니가 뉴질랜드에 비해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시드니도 여행하기 부족함 없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느낌 좋은 곳이다. 다만 내가 오롯이 여행을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주에서는 여행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불만 많은 투덜이 여행자가 된 것이다. 날씨가 안 좋아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여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날 신경 쓰이게 했던 건 바로 가이드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뉴질랜드 북섬, 남섬 그리고 시드니 이렇게 총 세명의 가이드가 여행을 안내했다. 가이드는 여행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데 호주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여행과 상관없는 말로 집중력을 자꾸 흩트려놨다. 게다가 우리는 각자의 여행 스타일이 있는데 자신의 여행 스타일대로 우리를 이끌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도통 여행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시드니의 멋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처음 가는 호주였기에 가이드의 설명이 필요했는데 호주 이야기보다 건강식품 이야기를 더 많이 들은 것 같다. 여행 스타일이 맞는 가이드를 만났다면 호주는 지금보다는 더 멋진 도시로 기억에 남아 있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