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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경 Jan 04. 2024

수상한 숙소 03.
투숙객과 사랑을 나누다.

  혼자만의 시간은 오래지 않아 시간이 다 돼버렸다. 8시부터는 숙소에서 독서이야기회가 열린다. 7시 반까지 공용테이블로 오라고 했으니 이제 슬슬 방을 나서야 한다     


  이곳의 투숙객들과 대면 대면하게 첫 만남의 스타트를 끊었으니 어찌 잘 안 풀릴 것만 같았다. 그런 불안한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방 문을 열었다. 독서회가 열리는 공간은 나의 방에서 몇 발자국만 가면 나타나는 곳이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거친 구멍이 뚫린 현무암 돌조각들이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짙은 나무색의 8인용 테이블이 있었다. 그 커다란 책상 가장 구석자리 의자를 끌었다. 그러나 바로 앉지 못하고 이내 테이블 뒤로 펼쳐진 책장에 마음을 사로잡혀 버렸다. 한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책표지를 색깔별로 묶어 무지갯빛으로 분류해 놓은 이 숙소의 서재였다. 그 찬란한 빛깔과 책등에 새겨진 제목의 힘을 빌려 책들은 각자 자신의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그 무지개를 따라가 본다. 한두 권씩 읽고 싶었던 책이 눈에 걸린다. 그렇게 멍하니 책 구경을 하는 와중 투숙객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내 책장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가 서울에서 가지고 온 책들의 페이지를 뒤적여본다. 괜스레. 


  머지않아 여사장님이 오셨다. 이 독서모임은 ‘사랑’을 주제로 40분간 읽고 필사를 한 후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이 만난 문장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눈다고 설명해 주었다. 대본을 외운 듯 조금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딱딱한 설명이었다. 나는 한 밤 머물고 가는 나그네에 불과하지만 이 모임을 매일 운영하는 입장이라면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리라. 설명은 그렇게 건조했으나 사장님의 일상 구어체에는 매우 호탕한 면모가 있었다. 투숙객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여러 화두를 던지며 먼저 모인 사람들과의 스몰토크를 유도했다. 그렇게 가벼운 대화가 오가는 와중 핑크카디건 소녀는 어느새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모든 사람이 모였고 각자 책을 읽고 필사하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인디밴드의 음악과 책장 넘기는 소리, 각자가 좋아하는 문장들을 서걱서걱 써 내려가는 소리. 여러 가지 백색소음들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나는 닮고 싶은 문체를 쓰는 작가의 산문집 속 형광펜 표시를 따라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책을 읽고 있는 자들이 너무도 평안해 보였다. 나도 새로운 이야기로 차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필사하던 책을 덮고, 수상한 서점에서 사 온 책을 폈다. 서점에서 만난 여행자에게 추천받은 여행에세이집이었다. 나는 온통 ‘사람들이 왜 여행이라는 행위를 사랑하는가’에 꽂혀 있었기에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는 게 너무 귀했다. 어제 처음 만난 서점의 그녀는 어쩜 나의 마음을 이리 잘 살펴 나에게 필요한 문장이 가득한 이 책을 추천해 줬을까. 그 기묘함과 감사함으로 기분이 한껏 달아오른다. 그 마음을 진정시키기라도 하듯 여사장님은 독서시간이 끝났음을 알렸다. 우리는 모두 책을 덮고 고개를 들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제 한 명씩 자신을 통과한 문장과 자신이 겪은 사랑 이야기를 꺼낼 차례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묵직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무겁지 않게, 적당한 유머도 곁들여지며 진행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여사장님의 능수능란한 진행이 한 몫했다. 투숙객 한 명씩 돌아가며 이야기할 때마다 그 내용을 정리해 주고, 다른 사람들과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경청과 공감이 어우러진 멋진 어른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 편안한 진행 덕에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겪어온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꺼낼 수 있었다. 그들이 뱉어내는 표현은 한 번씩 내 마음을 건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의 손은 바빠졌다. 행여 잊힐까 어느새 내 앞에 놓인 필사노트는 참가자의 말들 중 인상 깊은 것들을 기록하는 용도가 되어있었다. 나도 한 번쯤 내 입술을 통해 뱉어보고 싶었던 표현들을 사용해 말을 해본다. 여기서는 모두가 그렇게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 가며 자신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대화를 하기에. 그렇게 나의 사랑을 명명해보고 나니 머릿속이 명쾌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연인을 향한, 아이를 향한, 일을 향한, 여행을 향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이 오갔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은밀한 이야기들. 한 편의 옴니버스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일게 했다. 우리 대화의 끝 즈음에는 ‘자신을 향한 사랑’ 이야기로 수렴되었다. 나를 먼저 사랑해야 타인을 잘 사랑할 수 있다고.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여행을 택한 사람들. 이 여행 속 대화 속에서 자신을 더 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이곳은 그런 인물들이 모여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그들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애틋한 존재들이 되었다. 하루만 거쳐가는 이들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서로를 드러내고, 수용받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영혼은 한 층 성장했으리라.  



여행에 관한 생각과 여행 속 에피소드를 글로 풀어요.

<수상한 숙소> 편은 다음 포스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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