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대학원은 학위 받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2천만 원 태우고 깨달은 대학원 뽕 뽑기

by 해비

교사가 내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

대학원은 가장 달콤한 도피처였다.

솔직히 말하면, 석사 타이틀만 달면 유아 교육계의 대체 불가능한 인재로 '레벨업'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졸업장이 아니었다.

등록금 2,000만 원을 먼저 태워본 사람으로서 '감히' 말하자면,

나처럼 대학원을 도피처로 삼은 사람이 졸업장보다 먼저 건져야 할 진짜는 따로 있다.




1. 내향인(I)일수록 랩실을 탈출해라

나는 뼛속까지 대문자 I다.

사람과 엮이는 게 다소 부담이었던 나는 운 좋게(?) 입학 동기마저 없었고

완벽하게 고립되어 근 2년을 랩실에서 컴퓨터만 붙잡고 살았다.


하지만 졸업하고 보니 대학원에서조차 남는 건 결국 사람이었다.

취업 시장에서도, 현업에서 진행하는 실무 프로젝트에서도 결국 모든 기회는 사람을 타고 흐른다.

낯 가린다는 핑계로 네트워킹을 포기하는 건, 등록금 2,000만 원 중 일단 절반은 버리고 시작하는 것이다.




2. '졸업 논문'에 매몰되는 순간 망한다

석사의 최고 아웃풋이 논문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큰 착각이다.

논문은 편협했던 나의 시각을 고작 한 뼘 넓혀주는 도구일 뿐이다.

진짜 아웃풋은 졸업 그다음의 의사결정을 위한 수많은 고민이다.


졸업 논문의 주제를 잡는 건 단순히 글감을 찾는 행위가 아니다.

전공 내에서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내 강점이 어디에 있는지 데이터를 쌓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후 내 커리어를 어디로 '피봇(Pivot)'할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계속 학계에 남아 박사와 교수의 길을 걸을 것인가,

정부 기관의 정책 연구원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나처럼 사기업으로 튈 것인가?




3. 연구조교, 가장 싼 값에 하는 '직무 적성 검사'

어쩌면 연구조교는 대학원생에게 '박봉 노가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연구조교 시절 운 좋게 기업 협력 정부 과제에 참여하며 내 인생의 중요한 데이터를 건졌다.

바로 내가 학계보다는 기업 체질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랩 바이 랩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연구조교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다.

석사 졸업 후 내가 어느 필드에서 뛸지 미리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뮬레이션이었다.

나처럼 문과 출신이라면 적은 프로젝트비로 생활비까지 감당하기는 버거울 수 있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하게 해주는 적성 검사 비용으로 생각하면 이보다 싼 값은 없다.

(물론 내가 속한 랩 분위기랑 이것저것 고려해서) 연구조교의 기회는 무조건 잡았으면 한다.

이때 쌓인 데이터는 졸업 후 내릴 '의사결정'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될 것이다.






정리하자면,

아쉽게도 석사 졸업장이 내 앞길을 자동으로 닦아주지는 않았다.

대학원은 내가 꿈꾸던 커리어 세탁기라기보다는,

내가 앞으로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치열한 실험실에 가까웠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실험실 탈출 직전

내가 했던 마지막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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