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더워, 엄마 다리 아파, 엄마 집에 가자
누군가 나에게 여행의 백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호텔 조식이라 말하겠다. 폭삭 거리는 새하얀 호텔 침구에 하루의 지친 몸을 뉘이는 것도 물론 행복한 순간이지만, 전날의 피로로 땡땡 부은 눈을 뜬 다음 날, 세수만 하고 내려가면 입맛대로 골라먹을 수 있는 아침이 날 기다리는 건 무척 흥분된 일이니까. 세상에 가장 맛있는 음식은 누가 차려준 밥이고 심지어 저마다 취향이 다른 두 아이의 아침을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되는 이 홀가분함이란.
전날 밤늦게 도착한 숙소는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 보았던 사진과 너무도 똑같아서 우리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전면이 유리로 된 스튜디오 형태의 우리 숙소는 야경이 황홀한 쿠알라룸푸르가 뿜어내는 다채로운 불빛을 그대로 반사해 주었다. 겹겹이 에워싼 마천루 사이로 멀지 않은 곳에서 쌍둥이 타워의 첨탑이 교교히 빛난다. 이 풍경을 깨끗한 침구 위에 누워서 보는 호사라니. 장시간 비행의 여독 위에 숙소가 주는 흥분으로 뒤범벅이 된 아이들을 이내 곧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간밤의 진한 화장을 지운 단정한 맨 얼굴의 여자를 보는 것 같았다. 밤도 좋고 아침도 좋고 다 좋았다. 다만 하나 둘 부스스 일어난 아이들이 ‘엄마 배고파’를 외치기 전에는. 아, 장소만 바뀌었을 뿐 애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건 여기서도 계속되는 일이지. 여행이 아니라 살기를 택했으니 우선 즉석밥에 김을 싸서 허기진 아이들의 배를 채우고 구글앱을 켜서 가장 가까운 쇼핑몰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니 아이들은 몇 걸음 걷지도 않고 ‘엄마 더워’를 재생한다. 어젯밤 은은하게 빛나던 페트로나스 트윈타워가 그 전신을 우리 앞에 드러내는 길목에서 덥다는 애들을 인도 한쪽에 세워 놓고 우선 카메라에 담았다. ‘웃어봐, 서영아, 준영아.‘ 파리에 다녀온 사람들이 꼭 에펠탑 앞에서 사진을 찍듯, 쿠알라룸푸르에 다녀온 사람들 역시 약속이나 한 듯 이 트윈타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던데 나는 글렀다. 애들이 도와주지 않는다. 잠깐의 더위로 발갛게 상기된 아이들은 ‘엄마 어서 가자’란 말로 재촉한다.
입구부터 명품관이 늘어서있는 수리아몰, 중동 부자들도 쇼핑하러 이곳까지 온다는데 규모 또한 그에 걸맞다. 4개 구역이 십자형태로 되어 있어 들어온 입구가 어디인지, 방금 지나왔던 곳을 다시 찾는 것도 헷갈린다. 한국에서 타원형의 쇼핑몰도 두세 번은 와야 좀 익숙해지던데 이곳은 떠날 때쯤 익숙해질 복잡함이다. 우리의 출구는 코치 매장인 것만 기억하고 지하로 내려갔다. 한국에선 백화점 지하 슈퍼마켓을 애용하지 못하는 내가 이방인이 되어 고급 쇼핑몰 지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니 신이 났다. 한국 물가보다 조금은 저렴한 탓에 쿠팡에서 장을 보듯 필요한 물건을 거리낌 없이 담았다. 계란, 우유, 쌀, 빵, 식용유, 썰어놓은 열대과일 그리고 마일로 너겟도. 장을 보고 식품관을 돌다가 중동의 향이 느껴지는 식당으로 홀린듯 들어갔다. 아이들과 일 년 전 이태원에 갔을 때 파키스탄 식당에서 먹어봤던 사모사도 시키고 맛이 궁금한 음식들을 몇 개 더 시켜봤다. 낯선 향신료들이 입안에서 느껴질 때마다 어제 점심 짬뽕을 먹었던 내가 오늘 점심은 할랄 음식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내 이러려고 비협조적인 캐리어와 두 아이를 끌고 여기까지 온 거였으니까. 한 입 먹을 때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나를 아이들은 반도 먹지 않고 쳐다본다.
“엄마, 그렇게 맛있어? “
“응, 이런 음식 한국에선 먹기 힘들잖아. 왜, 별로야?”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좀 이상해. 엄마 다 먹어”
앞으로 이런 음식 매일 먹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안 먹으면 어떻게 하지 슬쩍 걱정이 들었다. 아니지. 오늘은 진입장벽이 높은 중동 음식으로 시작했지만 말레이 현지식도 있고 또 중국 음식도 있고, 일본 음식도, 인도음식도 있으니 다양하게 맛보자며 아이들을 안심시켰다. 에어컨 나오는 쇼핑몰에서 구경할 것도 많은데 아이들은 이내 ’ 엄마 집에 가자 ‘라고 한다. 고작 집에 있으려고 어제 비행기 힘들게 타고 여기 왔냐며 급기야 아이들에게 버럭 한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 엄마 다리 아파 ‘ ’ 엄마 배고파 ‘ ’ 엄마 더워 ‘ ’ 엄마 지루해 ‘ ’ 엄마 피곤해 ‘ ’ 엄마 집에 가자 ‘를 들으며 애들을 얼르고 달래야 한 달을 살아낼 수 있을까. 이러려고 온 말레이시아가 아닌데, 말레이시아 도착 후 만 24시간이 되기도 전에 ’ 내가 애들 데리고 왜 여길 왔지 ‘ 자문하게 되었다.
결국 아이들에게 맥도널드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사 먹이고 숙소로 돌아갔다. 집에서 300미터 거리도 안 되는 우리 동네 주민센터 옆에 맥도널드 있는데… 아, 늬들은 맥도널드 아이스크림 콘 먹으려고 말레이시아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