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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서린의 뜰 Nov 22. 2024

쓰디쓴 아메리카노 한 잔

그 많던 후원금은 어디로 갈까


딸아이 학원을 바래다주는 길에 오늘도 만났다. 유엔난민보호기구의 홍보 아르바이트생. 유동인구가 많은 다이소 앞이다. 생각해 보니 그때도 다이소 앞이었다.



둘째 중이염으로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갈증이 났다. 9월도 중순을 향해 가고 있지만 아직 한낮의 수은계는 여전히 여름을 가리키니 말이다. 오늘따라 평소에 마시지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생각나 방향을 틀어 커피숍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커피숍 가기 전에 편의점이 있어서 편의점에서 파는, 얼음 가득 담긴 컵에 부어 마시는 천 원짜리 커피를 마실까 아님 천 오백 원을 더 주고 테이크 아웃 커피숍 커피를 마실까 꽤 심각하게 고민하던 차, 젊은 청년이 대뜸 설문조사라며 스티커를 내민다. 설문 내용은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챙길 거였나, 무인도에 갈 때 제일 먼저 챙길 거였나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보드판에 스티커가 제일 많이 붙여진 곳을 보니 물과 먹을 것이어서 나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곳에 스티커를 붙였다. 마침 나도 목이 엄청 말랐으니. 그러자 그 청년은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냐 해서 무슨 종교단체인가 싶어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니 유엔난민기구에서 나온 캠페이너였다. 정우성 씨가 스케줄이 바빠 자기가 대신 왔다며 너스레를 떠는 청년을 올려다보자마자 미안하게도 풉 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종편 뉴스 중간중간에 매번 나오는 그 유엔난민후원자 모집 광고를 빤히 바라보는 어린 서영이에게 나중에 난민 아가들을 도와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며, 난민 아가들을 도와주려면 영어도 잘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영어의 중요성을 피력했던 나였다. 물론 현재 네가 누리는 당연한 것들 (비록 전세이나 비바람을 막아주는 집, 매 끼니 먹지 않고 반은 버리는 밥, 철마다 이모가 사주는 옷가지 등등)을 고마워해야 한다는, 네다섯 살 아이가 전혀 고마워하지 않을 세상의 가치들을 설명하는 것도 빠트리지는 않았다. 그때마다 서영이는 '엄마 그럼 난민아가(유니세프와 유엔난민보호기구의 홍보가 함께 나오니 큰 차이를 모름)들은 분유 못 먹어?'라고 걱정스레 묻고 나는 '마실 물이 없어서 흙탕물 먹는데 분유가 어딨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서영이는 '그럼 준영이 거 분유 갖다 주면 되겠네'라며 해맑게 대답했다. 또 어떤 날은 '엄마 난민아가들은 유치원 못 다녀?'라고 심각하게 묻고, 나는 '다닐 유치원이 어딨어. 살 집도 없는데'라고 귀찮은 듯 대답하곤 했다.


결혼 전 직장생활을 할 때는 세이브 더 칠드런 1:1 결연 후원을 몇 년간 지속했다가 전업주부가 되면서부터 후원금액이 부담이 돼 죄송스럽게도 후원을 끊게 되었다. 천주교 재단에 소속된 이주민을 위한 센터에, 외방선교회에 월 만원씩을 후원하는 건 차마 끊지 못했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지하철 광고에 환아를 위한 후원 문자 한 통에 5천 원 정도 하는 ARS가 있어서, 마침 태어난 지 서너 달 된 둘째가 병치레가 많아 둘째 생각하는 마음에 문자 한 통을 후원했다. 그 뒤로 그 NGO 단체에서 정기 후원을 해 달라는 전화가 와서 거절하지 못하고 매달 만원씩을 추가로 후원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유엔난민기구 후원이 사실 큰 부담이 되긴 했으나 또 뿌리치지 못하였다. 거처가 마련되지 않은 난민 고아 가운데 특히 여아의 경우 성범죄에 많이 노출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세상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많으나 수입이 전혀 없는 전업주부인 내게 그 후원금은 사실 꽤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으로 일 년 넘게 후원한 굿피플 후원을 중단하고 이제 유엔난민기구를 후원해야 하나... 후원 약정서에 서명하고 돌아오는 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남편 몰래 홈쇼핑에서 고가의 명품백을 할부로 주문한 주부 아무개 씨처럼 빠듯한 생활비에서 어떻게 이 후원금을 충당하지라며 한참 머리를 굴리며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서영 엄마’ 하고 누가 나를 부른다. 서영이가 다니는 유치원 학부모들이다.

“우리 여기 이디아에 커피 한잔 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갈래요?”

아까부터 마시고 싶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아, 저 집에 가서 둘째 약 좀 먹여야 해서요... “라고 말끝을 흐리며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흔히 후원을 종용할 때 한 달에 커피(스타벅스 기준이겠지 아마) 서너 잔 안 마시면 불쌍한 사람들 도와줄 수 있다고 한다. 한데 스타벅스는커녕 편의점 커피도 못 마시는 내가 누굴 후원하나 싶기도 했다. 힘겹게 유모차를 밀고 땀에 젖어 집에 오자마자 냉장고에 딱 하나 남아있는 커피 티백을 꺼내 뜨거운 물을 조금 붓고 냉동실의 얼음을 퐁당퐁당 넣어 결국 그리도 마시고 싶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의 눈물겨운 후원금이 후원단체 직원의 회식비나 간식비로 제발 쓰이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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