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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lee Aug 28. 2024

명작 만들기-3종 세트

작품 요소 분석-no. 1

주의! 이 글에는 다음 작품들의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너의 이름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 초속 5센티미터, 아쿠아맨, 브레이킹 배드, 덱스터, 드래곤볼, 귀멸의 칼날, 아바타: 물의 길, 칼리토,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 7번방의 선물, 맥베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명장면이란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명작은 무엇일까요? 당연하게도 정답은 '취향대로'입니다. 100명의 사람을 모아 놓으면 100개의 명작이 나오겠죠. 그렇다면 질문을 바꿉시다. 그 취향을 저격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물론 저는 프로 작가가 아니며 각본가도 아니며 편집자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단답을 할 수는 없습니다. 방법을 하나라고 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고요. 그렇지만 방법 중 세 가지를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취향을 저격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관객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일어날 때.

둘째, 관객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일어... 나지 않을 때.

셋째,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 분명해질 때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힘들 테니, 각 기술마다 하나씩 따져 봅시다.


1. 관객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일어날 때.

이런 종류의 명장면은 당장 떠올리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이 가능할 겁니다! <어벤져스:엔드게임> 의 "어벤져스 어셈블" 장면, <드래곤볼>의 초사이어인 각성 장면, <귀멸의 칼날>의 히노카미 카구라... 가장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명장면입니다. 관객들이 가장 원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보여주어서 쾌감을 주는 방법이죠.


제가 예시로 든 장면들의 공통점은 위기 상황에서 주인공들이 극적으로 회생해 반격하는 장면들인데요, 당연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관객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 중 흔한 예시가 '주인공의 승리' 일 뿐, '사랑의 결실'이나 '개인적인 구원' 같은 사건들도 모두 포함합니다. <아바타: 물의 길>의 결말에서 주인공 제이크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사는 땅을 싸워 지켜내는 것이 가족을 지켜내는 것임을 깨달으며 마음을 다잡는 장면 역시 '주인공의 개인적 구원'이라는 관객들이 바라는 장면을 연출해 명장면이 된 사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기술은 두 가지 기술이 하나로 합쳐진 것입니다. 관객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간절하게 바라는 점을 해소해 주는 것. 첫 번째 기술이 제대로 먹혀들어가지 않는다면 '해소' 부분을 아무리 극적으로 만들어도 어딘가 2% 부족하다는 점을 관객들이 바로 눈치챕니다. 예시를 들자면, 영화 <아쿠아맨> 이 마지막 수중 대전쟁을 어마어마한 규모로 연출해도 (규모만 따지면 <반지의 제왕>이나 <어벤져스>는 가볍게 뛰어넘습니다!) 세기의 명작에서는 2% 모자라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주인공 일행이 간절하게 바라는 (그러니까 관객들이 바래야 하는) '전쟁의 승리'라는 목표에 관객들이 몰입하는 정도가 약하기 때문이죠. 다행히 화려한 영화적 연출이 그 부족한 2%을 채워 주기 때문에 명작으로 등극할 수는 있었지만, 줄거리 상 허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간절하게 바라게 만들기'를 잘 한 작품은 무엇이 있을까요?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한 번 보죠. 이 영화는 초반부를 전부 이 '바라게 만들기'에 투자합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전 세계의 사람들 절반이 죽어버린 참사를 영웅들이 되돌린다'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의 목표인 '죽어버린 사람들을 되돌린다'에 관객들이 깊게 몰입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반부 전체에 걸쳐 '죽어버린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를 묘사합니다. 붕괴한 치안, 남아있는 유족들, 5년이 지난 후에도 과거에 얽매인 주인공들. 이런 작은 묘사들이 잘 깔려 있었기에 영화의 절정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이 살아나고 영웅들이 총집결해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이 명장면이 된 것입니다. 관객들 모두가 '죽은 사람들을 되살린다'라는 목표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목표를 해소했을 때 느끼는 감동은 어마어마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클라이맥스. 10년의 역사와 각본의 기술이 조화된 명장면이다.

또한 '간절하게 바라게 만들기'에서 준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기술이 있는데, 바로 '어렵게 하기'입니다. 주인공이 원하고 관객들이 원하는 목표가 더 멀리 있을 때, 더 힘들게 이루어질 때 목표 달성의 쾌감은 극대화됩니다. <엔드게임>의 중후반까지 주인공들이 엄청나게 고생해 가며 노력했기에, 결말의 전원 부활이 더욱 가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배고플 때 먹는 밥이 맛있잖아요? 또 다른 예시로는 영화 <너의 이름은> 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감독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을 떨어뜨립니다. 도시와 시골이라는 물리적 거리, 3년의 시간차라는 시간적 거리, 심지어 과거에 한 명이 이미 죽었다는 생사의 거리. 그렇기 때문에 마침내 두 주인공이 공간을, 시간을, 생사를 뛰어넘어 만나는 장면에서 느끼는 감동이 증폭되는 것이죠. <아쿠아맨>에서 부족했던 점이 바로 이 점인데, 이 '힘들게 하기'의 강도가 적습니다. '힘들게 하기'가 적으니 주인공의 목표가 달성되는 장면은 악전고투 끝의 보상이 아니라 그냥 보상으로 느껴지고, 당연히 감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2. 관객이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일어... 나지 않을 때.

참 이상하죠? 어떻게 관객이 바라는 것을 부정했을 때 명장면이 나올까요? 이 기술은 여러 가지로 나누는 것이 가능합니다.

일단, 관객이 애초부터 기대하는 것이 그런 내용일 경우. 예를 들어 <7번방의 선물>이나 <노량: 죽음의 바다> 같은 영화는 둘 다 배드 엔딩이지만, 애초에 광고나 역사를 보면 추구하는 바가 아주 명확합니다. <7번방의 선물> 은 관객들한테서 어떻게든 눈물을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며 관객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상태로 영화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성은 전혀 없고 윤리적인 문제도 많은 시나리오지만 많은 관객이 재미있게 본 것입니다. 비슷하게 <노량> 은 한국인이라면 결말을 모르는 게 그냥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슬픈 감정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았으니 주인공이 죽는 결말도 만족하고 받아들일 수 있죠.


둘, 관객이 바라는 목표 하나는 이루어졌는데 또 다른 목표는 뼈저리게 실패했을 때. <초속 5센티미터>는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안타깝게 재회하지 못하는 내용이죠. 어떻게 봐도 배드엔딩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초반부에 <소나기>를 연상시키는 애틋하고 순수한 첫사랑을 아주, 아주 아름답게 연출합니다. 관객은 당연히 두 사람이 이어지는 결말을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죠.


그런데 <초속 5센티미터>는 평가가 괜찮은 편에 속합니다. 감독의 최고작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관객이 원하는 또 다른 목표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과거의 첫사랑에 대한 미련을 시원하게 버리고 나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이 영화의 중반부에서 주인공이 첫사랑의 미련에 얽매여 성장하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모습을 공들여 묘사합니다. 영화가 관객들에게 두 가지 목표를 간절하게 바라게 만들고, 그중 하나만 해소해 주고 나머지는 철저하게 막아 버립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 영화의 결말에서 어딘가 후련하지만 동시에 아쉬운 기분을 동시에 느끼고, 결과적으로 느끼는 감동은 더 강해지게 됩니다.

<초속 5센티미터>의 마지막 장면.


셋, '관객이 바라는 것'과 '도의적으로 옳고 필연적인 것'이 다를 때. 이건 앞의 둘과는 달리 좀 더 구체적이고, 누아르 장르에서 많이 보입니다. <칼리토> 나 <맥베스> 등 '악인인 주인공이 욕망을 쫓아가다 처절하게 파멸한다'는 장르는 아예 이 기술 딱 하나로만 먹고사는 수준이고요. 이런 작품에서, 주인공은 보통 많이 공감 가고 인간적이지만 도저히 미화나 옹호가 불가능한 악인으로 나오며, 결말에서는 거의 100% 확률로 처절하게 죗값을 치르거나 아예 사망합니다.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은 암에 걸리고, 가난하며, 주위에서 무시당하는 소심한 중년 가장 월터 화이트입니다. 당연히 시청자는 주인공이 화려하게 성공해서 구질구질한 인생을 펴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인공은 크게 성공합니다, 마약을 팔고, 수없이 많은 사람을 직간접적으로 파멸시키고 죽이는 방식으로요. 시청자는 주인공이 인간적인 흠도 많고 가족을 아끼는 면도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지만, 절대 갱생이 불가능할 정도의 악인이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래서 결말에서 주인공이 죽을 때, 시청자들은 '주인공의 성공'이라는 목표가 처절하게 실패하기 때문에 큰 아쉬움과 슬픔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이 결말이 도덕적으로, 논리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다는 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관객이 간절하게 바라는 목표를 철저하게 '옳은' 방식으로 부정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조금의 안도감과 큰 슬픔을 줘서 감동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죠.

<브레이킹 배드>의 마지막 장면.


다만 이 방식은 엄청난 지뢰를 피해야만 제대로 작동합니다. 관객이 바라는 목표를 '옳은' 방식으로 부정해야 하는데, 관객이 바라는 목표의 '간절함'이나 배드 엔딩의 '정당성'이 부족하다면 그냥 배드엔딩이 되거나 어정쩡한 결말로 끝나는 수가 있습니다. 좋은 비교로는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와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있겠네요.

    두 애니메이션은 거의 동일한 줄거리를 공유합니다. 주인공은 비범한 능력을 타고났으며, 어느 날 신비한 여자와의 만남으로 범죄자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주인공과 동료들은 비범한 능력으로 명성을 드높이고 잠깐의 성공을 맛보지만,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동료를 잃고 궁지에 몰립니다. 주인공은 인간성을 버려가며 강한 힘을 얻어 동료들을 지키려 하나, 결국 부패한 체재와 공권력에 의해 비참하게 죽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의 희생으로 여주인공과 얼마 남지 않은 동료들은 살아남아 주인공을 추억한다... 하지만 두 작품의 평가는 크게 다릅니다. <엣지러너>는 대성공했고, <철혈의 오펀스>는 희대의 망작으로 남았죠. 왜 그럴까요?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2022년 작.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 2015년 작.

  바로 여기서 전술했던 '간절함'과 '정당성'이 중요하게 작동합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명백한 악인이지만, 동시에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비참한 사연과 성공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관객이 '주인공의 성공'을 바라게 만드는 1단계는 넘었습니다. 이제 그 목표를 '정당하게' 부정하면 명작이나 명장면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혈의 오펀스>는 여기서 주인공과 동료들의 악행을 지나치게 옹호하고, 그들의 파멸을 정당하거나 피할 수 없는 결말로 묘사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남은 건 미화받는 악인 주인공들이 딱히 정의롭지도 않고 이해가 가지도 않는 이유로 실패하는 결말입니다. 명백한 악인으로 묘사되어야 할 주인공을 옹호하는 바람에 관객이 '주인공의 성공'을 바라게 하는 데도 실패하고, 주인공의 파멸이 딱히 정당하게 느껴지지도 않으니 딱히 감동이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반면 <엣지러너> 는 절대 주인공을 옹호하지도 않으며, 주인공과 동료들이 파멸하는 과정을 세심하게 묘사해 주인공의 실패가 어떻게 보면 정당하고, 또 피할 수 없었던 결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주인공에게 몰입하고 공감하게 할지언정 미화하지는 않으니 관객은 마음 놓고 '주인공의 성공'을 바라게 되고, 또 주인공의 목표가 '정당하게 실패' 하는 모습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며 감동을 받게 됩니다.

    

3.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 분명해질 때

이건...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세 가지 예시를 들면 어느 정도 납득하실 겁니다. 예상을 뒤엎는 화끈한 반전. 추리소설에서 극적으로 밝혀지는 범인. 로맨스 장르에서의 고백. 모두 헷갈리거나 답답한 줄거리가 아주 명확하고 간단하게 정리되는 장면입니다. 당연히 관객은 지금까지의 모든 줄거리가 명쾌하고 시원하게 정리되니 큰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반전은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을 재정립하며 '아, 그게 사실은 그거였구나!' 하는 감동을, 밝혀진 범인은 '지금까지 머리 터지게 고민했는데 그거였구나!' 하는 감동을, 고백은 '지금까지 느낀 감정이 그거였구나!' 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주죠.

충격적인 결말의 추리소설로 언제나 회자되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의 영화화. 2017년 작.

좋은 예시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들겠습니다. 이 소설은 용의자 전부가 공범이라는 충격적인 결말의 추리 소설인데요, 소설 내내 주인공인 탐정 포와로는 이상할 정도로 치밀한 알리바이와 또 동시에 모든 용의자에게 존재하는 동기 때문에 골머리를 썩으며, 그 내용을 그대로 읽는 독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결말부에서 그 모호하고 헷갈리는 전개를 한 방에 전부 정리해 버리는 초대형 반전을 투척합니다. 지금까지 머리 터지게 고민해 온 만큼, 이 반전은 아주 큰 보상으로 작용합니다. 또한 2차적인 감동은 지금까지의 모든 장면들이 새롭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모든 승객이 범인이라는 점을 알면 작품 속의 모든 인물의 행동, 모든 알리바이가 전부 새롭게 보입니다. 즉 '모호한 진실 명확하게 밝히기'를 잘 사용하면 '모르던 것을 알게 됨'+'지적 노동에 대한 보상'+'새로운 시각을 제공'이라는 3단 감동을 주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단지 숨겨진 진실을 아는 것만이 이 기술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애매한 감정 분명하게 밝히기'가 어느 면에선 더 보편적이죠. 인물이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큰 감동을 줍니다. 관객이 인물에게 최대치로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죠. 좋은 예시로는 다 셀 수 없는 수준으로 많은 키스 장면들이 있습니다. 관객들이 인물의 '사랑'이라는 감정에 가장 깊게 몰입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널리 쓰이는 요소입니다. 물론 관객들이 감정에 이입을 못 하면 망하기 십상입니다.


예시를 하나 들어 보자면 <귀멸의 칼날>에서 주인공 탄지로가 새로운 기술 '히노카미 카구라'로 괴물을 멋지게 무찌르는 장면을 보죠. 일단 전술했듯이 이건 '주인공의 승리'를 관객이 간절히 바라게 만든 후 멋지게 승리하는 장면이니 첫 번째 기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장면이 명장면인 두 번째 이유는 주인공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행동 원리이자 동기인 '가족에 대한 유대'라는 감정을 가장 강하게 대사로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가족애를 드러내는 장면이 없기에, 회상까지 동원하며 주인공의 심리를 직관적으로 때려박으니 관객은 '애매한 감정의 폭발적인 분출'에 아주 큰 감동을 받는 것이죠.


다만 이 기술은 긍정적인 명장면에만 적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픔과 안타까움을 크게 증폭시켜 명장면을 만들어 낼 수도 있죠. 좋은 예시로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봅시다!

<시빌 워>의 클라이맥스는 극히 사적이며 정의와는 관련이 없다.

<시빌 워>의 절정 부분에서 주인공인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은 캡틴의 친구인 버키가 아이언맨의 부모를 살해한 범인이라는 진실을 알고 극히 사적인 이유로 서로 싸우게 됩니다. 캡틴은 친구인 버키를 지키기 위해, 아이언맨은 부모의 원수를 죽이기 위해서요. 이 장면이 명장면인 이유는 복잡한 구도가 순식간에 명료해지기 때문입니다. 영화 내내 복잡하게 얽히던 과거사, 욕망, 정치적 관계, 음모, 복수, 이 모든 게 전부 날아가 버립니다. 영화가 '극도로 복잡한 정치극'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싸움'으로 변모하는 거죠. 이제 관객은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두 주인공의 싸움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또한 이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들은 전부 영웅들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순수한 감정을 토해내는 식입니다. "그는 내 친구야." "나도 그랬지."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상관없어. 내 엄마를 죽인 놈이야." 이런 식이죠. 각각 '친구를 지킨다'와 '부모의 원수를 갚는다'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죠. 영화 내내 이어지던 설득, 토론, 정치적 사안 등 복잡한 대화가 순식간에 단순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의 각본은 주인공 둘에게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해 쓰였으며, 따라서 '복잡하던 감정의 단순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애매한 감정 밝히기' 기술을 사용해 두 주인공에게 관객이 최대한 몰입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이 비극적인 싸움에서 느끼는 안타까움을 극대화해 만든 명장면인 것입니다.


번외. 융합

당연하게도 이 세 가지 방법을 한 번에 하나만 쓰라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보편적인 명작이나 명장면일수록 이 세 가지 기술을 자유자재로 합치고 변주하는 편입니다. 좋은 예시로는 영화 <너의 이름은> 이 있죠. <너의 이름은>의 클라이맥스는 이 세 가지 기술을 전부 동시에 써 버립니다. 주인공 둘이 드디어 만났다는 점에서 '간절히 바라는 목표의 달성'을, 주인공 둘이 서로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면에서 '간절히 바라는 목표의 부정'을, 그리고 주인동 둘이 영화 내내 은근하게만 표현되는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는 점에서 '모호함의 분명해짐.' 물론 그에 비례해 감동의 정도는 더 커집니다.

세 가지 기술을 전부 구사해 만들어진 명장면.

아니면 드라마 <덱스터>의 결말도 좋은 예시겠죠. <덱스터>의 주인공 덱스터 모건은 흉악범만 골라 죽이는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인데요, 시즌 1의 결말에서 덱스터는 본인의 숨겨진 형을 만나서... 죽여버립니다. 그의 형 역시 연쇄 살인마였고, 하필 형이 노리는 대상이 주인공의 여동생이었던 탓이죠. 그리고 이 드라마는 시즌 1에 걸쳐 주인공이 느끼는 연쇄 살인마로써의 고독과 이해자의 부재라는 고통,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애착을 길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시즌 1의 끝에서 그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토해내죠. 그러니까 시즌 1의 결말 역시 주인공의 출생의 비밀(숨겨진 진실)+주인공의 진솔한 감정(애매한 감정의 표출)+연쇄살인마의 처단(관객이 원하는 것)+이해자를 자기 손으로 죽임(관객이 원하지 않는 것)을 사용한 명장면인 셈이죠. 이렇듯 이 세 가지 기술들을 잘 사용하면 서로 보완해 더욱 명작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덱스터>. 시즌 1~2는 역대 최고의 미국 드라마라 평가받는다.

지금까지 명작/명장면을 만드는 세 가지 기술에 대해 설명했는데요, 당연히 명작의 기술은 이 셋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영화라면 연출과 연기, 그리고 촬영이, 소설이라면 필력과 묘사, 문체가, 만화라면 그림체와 구성 등 수많은 부가 요소가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스스로 이런 '명작 만들기 법칙'을 발굴하고, 혹시 창작자라면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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