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히어로 비틀기 비틀기
슈퍼히어로 비틀기는 슈퍼히어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이 장르의 기원을 추적하자면 <돈키호테>까지 올라가야 할 정도니까요. <슈퍼맨: 레드 선>, <왓치맨>, <더 보이즈> 등, 슈퍼히어로 비틀기는 '인간의 선한 가능성과 힘'을 나타내는 슈퍼히어로 장르를 180도 뒤집어 인간 내면의 악과 폭주하는 초인이 만드는 재앙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클리셰가 그렇듯이, 클리셰도 비틀면 언젠가 그게 클리셰가 됩니다. 즉 슈퍼히어로 비틀기 장르도, 이제는 클리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죠. 아직 국내에 번역되진 않았지만, 이 소설 삼부작은 슈퍼히어로 장르를 꽤 잘 비틀어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줄거리는 무엇이고 특징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주인공 데이비드 찰스턴은 미래의 시카고에서 사는 소년으로, 어린 시절 사악하고 강력한 초능력자 스틸하트에게 아버지를 잃은 후로, 갑자기 인류들 사이에서 출현한 초능력자 '에픽'에 대해 연구해 왔습니다. 복수하기 위해서죠.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데이비드는 사악한 초능력자에게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조직 레커너즈 ('사유하는 자'라는 뜻입니다)에 가입하게 되고, 과거가 베일에 싸인 레커너즈의 창립자 '교수'와 함께 스틸하트를 무찌르고 인류를 에픽의 공포에서 해방하기 위해 싸우게 됩니다.
장점:
1. 독특한 설정
현대 미국 판타지물 작가들 중, 브랜든 샌더슨은 꽤 유명한 축에 속합니다. <미스트본> 은 국내에 정발도 되었고요. 이 책에서 잘 나타나는 작가의 특징은 설정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 데이비드 찰스턴은 사악한 초능력자 스틸하트에게 아버지를 잃고 복수하려는 인물입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복수귀형 주인공인데, 여기서부터 작가의 설정이 끼어듭니다. 데이비드는, 1권의 적인 스틸하트의 '약점'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은 슈퍼히어로 장르답게, '에픽'이라는 초능력자들이 존재하는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늘에는 '칼라미티'라는 붉은색 빛이 떠다니고 있고요. 스틸하트는 슈퍼맨을 모델로 한 악당 에픽으로, 미래의 시카고를 지배하는 독재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에픽은 그와 같이 악당입니다. 어떤 능력을 가지던, 모든 에픽은 사악해집니다. 슈퍼히어로 장르를 뿌리부터 비틀고 있는 거죠. 독특한 점은, 에픽들에겐 각각 독특한 '약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나이의 사람을 만나거나, 특정한 시각적 자극을 보거나, 특정한 빛을 받으면 능력이 봉인되는 겁니다. 설정이 상당히 많죠? 이 정도는 가장 평범한 설정들입니다. 소금으로 지어진 이동 도시, 특이 면역성 등등 더 해괴한 설정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설정 하나하나가 상당히 독특한데, 이 설정들에 기반해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바뀌는 것도 신선합니다. '칼라미티' 는 감탄사로 쓰이고, 에픽 앞에서는 눈을 내리깔고 보잘것없게 보이는 것이 보편 상식이라거나, 에픽이 날뛰는 도시에선 언제나 죽을 수 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파티가 벌어진다거나...
2. 엄청난 속도감
이 책의 장르는 YA, 영 어덜트 소설입니다. 청소년 대상의 오락성을 중시한 문학으로, <메이즈 러너> 나 <헝거 게임>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나라의 웹소설과 유사하게 영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간결한 묘사와 속도감이 특징인데요, 이 소설 역시 전개가 무지하게 빠릅니다. 뭔가 지겨울 때 쯤이면 장소가 바뀌던, 엄청 큰 문제가 생기던,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던 뭔가 새로운 요소가 날아듭니다. 어떤 대화도 몇 장 이상 끌지 않으며, 난해한 철학적 토론도 없습니다. 인물들은 섬세한 심리 묘사로 감정을 표현하기보단 바로바로 감정을 말해버리고, 대부분의 갈등은 아주 단순하고, 해결 방법이 명확합니다. 인물 관계도 빙빙 꼬이고 뒤엉킨 것은 없고, 친구, 적, 중립, 셋 정도로 명확히 갈립니다. 새로운 설정들은 그때마다 직접 풀거나, 설명 안 해도 넘어갈 수 있는 것들뿐입니다. 이것 때문에 독자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야기의 모든 요소는 작가가 먹기 좋게 조리해 입속에 넣어줍니다. 생각을 할 필요가 없으니 읽는 속도도 빨라집니다. 장르 이름은 영 어덜트지만, 청소년만 읽으라는 법은 없으니 잘 골라 읽으시면 됩니다. 우리나라 웹소설도 이름은 웹소설이지만 [퇴마록]이나 [눈물을 마시는 새]는 웹소설로 안 치듯이요.
3. 주제의식
이 시리즈의 주제 의식은 꽤 단순합니다. '인간은 공포를 극복함으로써 폭력적인 본성에서 벗어나 영웅이 될 수 있다.' 인간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면은 보통 공포에서 기인합니다. 현재 인터넷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세상은 나를 탄압하는 무서운 곳이라는 망상. 현실의 정치 집단에서 많이 보이는, 상대편 당은 이 나라를 파멸시킬 거라는 확신. 낯선 인종, 낯선 성적 지향, 낯선 문화에 대한 공포. 그리고 이 모든 공포들은 보통 공포의 대상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분출됩니다. 그리고 이런 공포를 회피하며 계속 증오를 분출하는 이들은, 결국 막상 그 공포를 직접 마주하면 한없이 약하고 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동성애 혐오자와 실제 동성애자를 붙여 놓으면 누가 더 추해 보이겠습니까? 이런 사회적 담론이 슈퍼히어로물과 어떻게 연관되냐고요? 놀랍게도 아주 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가장 핵심적인 설정과 최종적인 갈등의 해결 방법이 그거거든요. 인간은 악하고,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 공포를 마주하며 나오는 회피기제이며, 그 공포를 마주해 극복하는 이는 진정으로 선한 영웅이 될 수 있다. 말했죠? 슈퍼히어로물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가능성과 힘이라고. 저는 그래서 이 작품을 슈퍼히어로물을 180도 뒤집고 다시 180도 뒤집은 정통 히어로물이라고 봅니다.
단점:
1. 난해한 설정
설정이 참신하다는 점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설정들 대다수가 좀 지나치게 독특하고, 상당수의 설정은 그냥 배경에 그치고 설명이 없거든요. 정말 중요한 설정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설명이 되지만,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쏟아지는 걸 감당하지 못한다면 아마 1권도 못 견딜 겁니다. 예시를 들어, 시카고의 지하 터널은 어떻게 생긴 건지, 에픽에게 저항하는 단체 레커너즈는 정확히 어느 정도 규모의 조직인지 같은 세세한 요소들은 아예 설명조차 없습니다. 물론 작 중 등장하는 오만 가지 신기술들 역시 '에픽의 힘을 활용했다' 정도로 넘기고 그 이상 설명이 없습니다. 이 책의 중점은 독특한 설정 그 자체지 설정을 깊게 파고드는 것은 아니거든요. 칼라미티가 무엇인지, 에픽의 약점은 왜 생겨나는 건지 등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설정들은 삼부작의 상당 분량 동안 꼭꼭 숨기다 거의 마지막에서야 우르르 풀어놓는데... 이게 취향에 맞는다면 아주 명쾌하고 참신한 설명이겠지만, 취향에 안 맞는다면 3부까지 가기도 전에 나가떨어질 겁니다.
2. 저기요, 작가님?
위의 요소 하고도 맞물리는 점인데, 전개가 묘하게 막 나갑니다. 위의 빠른 전개하고 일맥상통하는 단점인데, 웹소설은 전개가 빠르지만 연재물이라 전체 분량을 모아보면 상당히 되는 편이죠. 그런데 장편소설의 분량에서 웹소설의 스피드를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기-승-전-승-전-승-전-승-전-결 느낌이 납니다. 계속 위기-해결-위기-해결을 반복하면서 독자를 절대로 놔주지 않지만, 책을 다 읽고 돌아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 거죠. 갑자기 에픽의 약점이 밝혀지거나, 주인공이 박수무당처럼 냅다 정확히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갑자기 급전개가 벌어지는데 등장인물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등, 어 어 어 하다가 정신 차리면 이야기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작가가 청소년용이라는 사실을 좀 의식했는지, 문체나 묘사가 묘하게 평이합니다. 누군가 하고 싸워서 죽이면, 딱 죽었다, 까지만 말하고 바로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뭔가 강렬한 필력이나 깊이를 원한다면, 작가의 다른 책을 읽으세요.
지금까지 봤듯이 레커너즈 삼부작은 속도감과 접근성을 위해 몇 가지는 희생했지만, 작가가 작가이니 '어, 좀 빠른데...'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참신한 설정과 탄탄한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소설입니다. 잘 쓴 웹소설 읽는다는 느낌으로 아마존에서 사거나, 원서를 구하시면 됩니다!